중국 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여자 황제에 오른 당나라 고종의 비 측천무후가 705년 12월 16일 사망했다. 80세였다. 본명은 무조로 산동성 문주현 출신이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 중국 역사상 그녀가 가장 많이 조명받는 이유는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제이기 때문이다. 무측천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690년 황제로 오르면서 나라 이름을 ‘무주(武周)’라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임종시에 자신을 ‘황제’가 아닌 ‘황후’로 하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겐 ‘측천무후’라는 별칭으로 더욱 알려져 있다. 그녀가 대단한 것은 평민 출신으로 당 태종의 재인으로 들어가서는 그의 사후, 아들 당 고종 이치의 황후가 되었다가 결국엔 황제에 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사실상 60년 동안 절대권력을 휘두른 인물이었다.
1) 궁중에 입궐
무측천의 본명은 무조(武照). 624년(唐 高祖 武德 7년) 1월 23일 수도 장안(長安)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638년 13세에 당 태종의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했다. 이때는 당조가 태종의 노력으로 중국을 막 재통일한 시기였다. 태종은 당나라 2대 왕으로 형과 동생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이세민이다. 태종이 병사하자 관습대로 비구니가 되었으나 태종 생존시부터 깊은 관계를 맺어 왔던 고종(태종의 아들)에 의해 다시 궁궐로 들어와 소의 자리에 올랐고 32세인 655년에는 황후로 책봉됐다.
그렇다면 왜 당 고종 이치는 그런 후안무치한 짓을 저질렀을까? 이야기는 이치가 아직 태자였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치는 병상에 누운 아버지 당태종을 열심히 간호했다. 그런데 측천이 그에게 애틋한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원래 측천은 당나라 때의 법도에 따라 고종이 죽으면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에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측천은 꽃다운 자신의 인생을 결코 비구니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 당 고종을 유혹했고,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
2) 고종의 황후가 되다
태종 사후 이치는 왕이 된다. 당고종 이치의 왕황후에게는 안타깝게도 소생이 없었다. 반면에 당 고종의 총애를 받는 소숙비에겐 아들이 있었다. 궁중암투를 벌이고 있던 왕황후는 측천을 궁에 끌어들이면, 당연히 소숙비를 견제할 수 있을거라 착각했다. 그렇다고 당 고종이 감업사에 간 측천을 바로 부른 것은 아니었다. 황제에 오른 이후 정신이 없었던 고종은 아버지의 분향차 다시 감업사에 들렸다가 측천을 보고 그제서야 황실로 데려오게 되었다. 물론 왕황후의 승낙이 주효했다. 그녀가 반대했다면 측천의 인생은 비구니로 끝났을 것이다.
왕황후가 측천의 본 모습을 알게 되는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왕황후와 소숙비가 힘을 합치기 시작했고, 측천은 위기를 느꼈다. 그리고 무서운 사건이 벌어진다. 왕황후가 측천 소생의 공주를 보러왔다가 나간 이후, 강보에 쌓인 아기가 죽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당 고종은 크게 분노하고, 즉시 폐서인을 시키려 한다.
그러나 측천은 이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우선 왕황후가 아기를 죽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는 왕황후가 공주를 무척 예뻐한 것은 사실이었으며, 만약 그녀가 죽였다고 해도 아마 아기를 돌볼 줄 모른 나머지 ‘실수’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히려 주변에선 측천이 왕황후를 모함하기 위해 고의로 자식을 죽였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사실 학계에서는 황후가 되기 위해 자신의 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주장이 강하다) 무엇보다 그녀가 반대한 이유는 아직 왕황후를 폐서인 하기에는 시기와 명분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좀더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왕황후는 변호하는 척해 더더욱 당 고종의 환심을 더욱 사기 위한 계산도 있었다.
어쨌든 이 일로 당고종의 왕황후를 향한 분노는 걷잡을 수 없게 커지게 된다. 물론 측천은 반대만 하고 손 놓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황금을 풀어 황궁내에 자신의 편을 만들어 나갔다 특히 왕황후 주변의 궁녀들과 환관을 매수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왕황후가 황제와 비빈들을 저주했다는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이 역시 왕황후가 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측천이 왕황후를 몰아내기 위해 모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어찌되었건 당 고종은 병상에 누워 있었고, 침이 꽂힌 인형이 발견된 것에 대해 왕황후의 변론은 먹히질 않았다.
문제는 이때까지 장손무기를 비롯한 고명대신들이 당고종과 측천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강력하게 주장하면 당고종이 ‘말을 들을 거라’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 착각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수량은 왕황후의 폐위에 반대하면서 그녀가 폐위될만큼 잘못한 게 없고, 설혹 그녀가 폐위되더라고 측천이 아니라 명문가 규수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당 태종을 들먹이며 권위로 당 고종을 찍어누르려 했다.
당시 28세의 팔팔한 나이이자, 6년이나 황제를 지낸 당 고종은 저수량의 말에 불같이 노했다. 그는 유약한 사람이긴 했지만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했다. 훗날 당고종이 당태종의 유언을 거스르면서까지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은 아버지를 능가하는 업적을 세워,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정관의 치’를 이룩한 것으로 유명한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는 사실 만으로 초조하게 된 당 고종의 마음을 당시의 대신들은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고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를 당장 사형에 처할 것을 명했고, 놀란 대신들이 변호하는 덕분에 간신히 목숨은 건져서 유배형으로 끝났다.
당고종은 결국 자신의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 655년 10월 13일 왕황후와 소숙비를 폐위하고, 19일 소의 무씨를 황후로 세운다는 조서를 발표했다. 이치가 조서를 내린지 사흘 만에 측천은 고종에게 한원과 내제에게 포상을 내려달라고 부탁한다. 한원과 내제는 측천을 황후로 내세우는데 가장 반대한 신하들이었다. 그런 신하들에게 은전을 내림으로써 자신의 도량을 보이고, 그들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한 것이었다. 한원과 내제는 은전을 받으면서 떨떠름했다. 그들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측천이 황후가 된지 26일지 지나자, 왕황후와 소숙비에게 자결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2년 뒤 한원과 내제는 강등되었고, 4년 뒤에는 장손무기가 죽임을 당했다. 물론 그들의 죄는 ‘모반’ 이었다. 한원 역시 모반혐의에 걸려들었으나, 이미 사망한 뒤라 의미가 없었다. 내제는 더욱 행복한 케이스로, 돌궐과의 전쟁중에 사망해서 측천의 모함에 걸리지 않고 명예로운 최후를 맞이할 수 있었다.
655년 11월 1일 측천은 성대한 의식을 치루며 당나라의 황후가 되었다. 원래 황후가 될 수 없었던 신분의 여인은, 당태종의 여인이었음에도 비구니가 되지 않고, 이렇게 당 고종 이치의 황후로 봉해지게 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그녀가 자신의 역량을 슬슬 펼쳐보이는 것이었다.
3) 아들들과의 권력 다툼
커져만가는 측천무후의 힘 앞에서 고종은 골머리를 앓기 시작한다. 폐위 시킬 힘은 없고 그렇다고 내버려두기도 난감하고. 고종이 생각한 묘안이 권력을 태자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태상왕으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고종과 측천무후 사이의 아들이자, 현재 태자인 이홍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준다면 측천무후의 권력도 상대적으로 줄어들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때부터 고종은 태자가 정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늘렸고, 태자 이홍은 점차 민심을 얻고 조정의 실권자로 부상하기 시작하다. 그러나, 측천무후는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에 아들을 죽이게 된다. 675년, 태자 이홍은 부모와 함께 식사를 마친 후 갑자기 요절하고 마는데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누가 태자를 죽였는지는 모두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홍이 죽자, 측천무후의 둘째아들 이현(李賢)이 태자로 책봉된다. 이현은 젊은 나이에도 주관이 뚜렸하고 박식하였고 상당한 재능이 있었다. 형의 죽음을 잘 알고 있던 이현은, 자신의 어머니 측천무후를 엄청나게 경계한다. 자신의 거처에 호신용 무기를 대량으로 숨겨두고 측천무후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해나갔다.
이현이 이렇게 나오니 권력에 위협을 느낀 측천무후는 다른 사람을 시켜 이현이 정변을 꾀하고 있다고 거짓 발고를 하게 하고 그에 따라 이현의 거처를 들이닥쳐 수색을 했는데 마침 호신용으로 숨겨뒀던 다량의 무기가 발견된다. 이것을 근거로 측천무후는 아들을 서인으로 강등시켜버리고 파주로 귀양을 보낸다. 그리고 몇년 후, 측천무후는 유배지로 사람을 보내 이현과 그의 세 아들, 즉 손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려 후환을 없앴다.
683년, 세번째 아들 이현(李顯_ 둘째 아들과 한글 독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름)이 태자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고종이 붕어하고 이현이 제위를 물려받아 '중종' 이 된다. 하지만 중종의 권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고 이에 불만은 쌓여만 갔다. 이러던 중에 ‘위현정’이라는 부하의 승진 문제로 다투을 벌이다가 결국 특천무후에 의해 황위에서 쫓겨나고 만다.
자신의 세 아들을 내쫓은 측천무후, 이젠 황위를 계승할 사람은 막내 아들 이단(李旦)밖에 없었다. 이단은 황제의 자리에 올라 '예종'이 되지만 즉위 직후 내궁 깊숙히 연금되었고, 국가의 모든 대권은 측천무후의 것이었다.
4) 황위에 오른 측천무후
690년, 측천 무후는 드디어 황제에 오른다. 그녀는 나라의 이름도 당에서 주(周)로 바꾸고 '성신황제(聖神皇帝)'라는 존호가 더해진다.
이렇게 파란 만장한 과정을 거쳐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게 된 측천무후. 정치적, 군사적 업적만 따진다면, 그녀는 분명히 대단한 황제였다.
측천무후 시절의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영토가 서쪽으로 페르시아에 이르고 남쪽으로 지금의 베트남 북부에 이르렀다. 그녀는 국가제도를 완전히 개혁하고 여러가지 새로운 시도를 단행했다. 귀족 위주의 관리 등용에서 벗어나 능력있는 선비를 등용하려 과거제도를 시행 하였으며, 백성의 소리를 듣기 위해 '진실의 함'을 도입했다는 기록도 있다.
모친상 때도 부친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3년간 상복을 입게 했고, 여성을 광대로 희롱하지 못하게 했다. 또 과부의 재혼도 가능하도록 했다.
사실 이것은, 여성의 인권신장보다는, 여자로서의 측천무후의 자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벌인 일들인데, 심지어 그녀는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아들인 예종의 성을 이씨에서 자신의 성인 무씨로 바꾸게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여자도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강한 자의식으로 기존 체제와 통념의 거센 반발을 극복하고 황제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그녀의 몰락
측천무후는 자신이 황제에서 쫓아냈던 셋째 아들 이현 (중종)을 다시 불러들여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모든 정권은 자신의 손 안에 두었다.
지고지상의 자리에 오른 측천무후는, 문득 공허함이 밀려온다. 그래서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남총 (남자 첩)을 들여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겼는데, 장역지와 장창종 형제가 바로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남총들은 측천무후의 총애만 믿고 권세를 휘두르다가 신하들의 불만을 삽게되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조정에는 또 한바탕 파란이 이는데 재상 장간지 등 여러 신하가 조정에서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단숨에 장씨형제를 체포해 죽여버렸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낙양성 서남쪽의 상양궁에 감금시켜버리고 이현을 황제로 옹립한다. 여제(女帝)로서 16년 간의 군림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때가 705년의 일이고, 측천무후는 같은 해에 상양궁 선거전에서 눈을 감고 만다. 그녀의 나이 82세의 일이었다.
무측천의 묘에 있는 비석, 무자비(글자가 없는 비석이라는 뜻) 현재에는 중국 섬서성 박물관 비림에 옮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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