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초반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4.28-2006.12.30)은 이라크 티크리트의 수니파 무슬림 중에서 하층민 출신이었다. 젊어서부터 친척인 하이랄라 탈파 등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받았고, 아랍 통일의 이념을 가지고 바트당(부흥당)에 가입하여 반정부 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아랍통일주의를 지지하는 민중들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에 성공한 이라크의 카심이 아랍통일을 등한시하고, 서구와 협력하여 이라크 내정 발전을 꾀했기 때문에, 바트당은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바트당은 카심 암살을 기획하였으나, 사담 후세인이 포함된 암살팀이 작전의 허술함으로 실패, 사담 후세인과 동료들은 시리아로 탈출하여 해외 망명생활을 시작한다.
2. 정치활동
1963년의 이라크 군부의 쿠데타로 카심 정권이 붕괴되고, 압둘살람 아리프 정권이 들어서자 바트당은 이라크에 복귀하였다. 이후 아리프 정권과 대립하게 되고 1968년 쿠테타를 통해 바트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당시 아랍 특유의 피의 복수 관습을 의식하여, 치안첩보를 전담하는 '일반 사무국'의 수장 자리는 아무도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사담 후세인이 '악역을 맡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일하겠다'고 공언하여, 그가 일반 사무국, 즉 첩보치안기구의 수장이 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호랑이에게 이빨과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었다. 이 또한 스탈린이 아무도 맡지 않으려던 혁명 자금책(=은행, 열차 강도)을 맡아 레닌의 신임을 얻었던 것과 비슷하다.
사담 후세인은 첩보기구의 능력을 이용하여 반정부운동을 효과적으로 차단함과 동시에, 정적들의 약점을 잡아두기 시작했고, 내각 요인들 중에서 위협이 되거나 그리 판단되는 사람을 처형하거나 암살하는 작업을 통하여 바트당의 독재 권력을 강화시켜 나아갔다. 안으로는 바크르의 신임을 받으며,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에 사무실을 두고 정권 수뇌부와의 연대를 더욱 키워 나아갔으며, 이리하여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977년에 부통령 자리에 오른다.
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그의 업적이 하나 둘 이루어진다. 가장 큰 업적은 IPC(이라크석유조합)의 국유화를 들 수 있다. 이라크 석유조합은 서방 석유화학기업의 이라크 유전개발 조합으로서, 이라크 유전의 수익은 모두 그들이 나눠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국고는 70년대 고유가 정세를 타고 황금으로 가득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의 근대화를 개시하였다. 대표적인 정책은 문맹퇴치, 고속도로와 전기사업, 전화보급, 여성의 사회참여 강화, 의무교육 확대, 과학기술 발전, 사막화되어 가던 이라크 국토를 다시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옥토로 부활시키는 거대 프로젝트, 시아파와 쿠르드족에 대한 사회간접자본 우선보급을 통한 이라크 통합정책 등이 있었다.
Iraqi Vice President Saddam Hussein, center, stands with the Castro brothers during a visit
이러한 정책은 서방세계에 매우 긍정적인 인상을 주었고, 이라크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며, 특히 문맹퇴치 운동은 성공리에 마무리되어, 유네스코에서 극찬을 받고 수상까지 하게 되었다.
사담의 권력이 점차 강화되어가자, 이에 위기를 느낀 바크르 대통령이 사담에 대한 정치공작을 시도하기 하게 되고, 사담은 자신에 대한 바크르의 견제가 확실해지자 결국 바크르에게 퇴임을 강요했고, 내각 구성원들과 군부마저 사담을 지지했다. 때문에 1979년 7월 17일 바크르는 표면적으로는 병을 이유로 대통령 자리를 내주고 1982년까지 살다 68세를 일기로 조용히 죽었다.
3. 대통령 집권
1979년 대통령이 된 사담 후세인은 전 정권에서 일했던 관료를 비롯해, 하급 공무원에까지 이르는 대대적인 숙청을 개시하며, 이전부터 공고화되었던 국민감시체제를 한층 강화했다. 이렇게 숙청된 사람들 중에는 사담 후세인의 경제개발계획을 함께 이끌어왔던 유능한 관료들도 상당수 있었다.
특히 혁명평의회의 주요 임원 가운데 반역자로 지목된 의원들의 머리를 동료 의원들이 직접 총으로 쏴 죽이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이자 후세인 집권을 도운 절친한 친구, 아드난 함다니를 이유도 없이 총살시켰는데,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1979년에 살해된 의원들만 60명이었고, 집권 이후 3천명 이상의 정치가들이 처형당했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정작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부통령 시절의 치밀하고 심사숙고하며 예의 바른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권위적이며 즉흥적이고 앞뒤 생각 없는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1988년에 이라크 내 쿠르드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독가스와 화학무기로 쿠르드인 5000명을 학살하였고, 1991년 걸프전 후 이라크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시아파가 봉기하자 이를 탄압하며 약 10만 명의 시아파인 들을 죽였다.
관공서나 집집마다 자신의 사진을 걸도록 강요하고 만약 사진을 걸지 않으면 반체제로 간주해 처벌했으며, 곳곳에 비밀경찰들이 도사리고 있다가 반정부 인사들을 색출, 체포, 고문했는데, 여자와 아이들도 예외는 없었다. 경고로 사람들의 귀를 베고 전기로 지지고, 거꾸로 매달아 뼈가 부러지도록 구타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이라크 내에서 고문이 합법적이어서 이라크 경찰서에는 강간실까지 두고 사람들을 고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사담 후세인 재임 기간 중 살해당한 사람은 적어도 50만명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4. 이란-이라크 전쟁 (1980-1988)
사담 후세인 정권은, 1979년의 이란 혁명이 이라크 국내의 시아파에게도 파급하는 것을 두려워해 1980년에 이란을 선제 공격,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다. 원래, 이란과는 팔레비 왕조 시대부터 국경을 흐르는 사트 알 아랍 수로의 영유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었으며 역사적인 이라크의 반(反) 이란 감정도 전쟁의 배경에 영향을 주었다. 개전 초에는 이라크가 우세했지만, 차츰 물량이나 병력이 우수한 이란이 반격해 이라크 영내에까지 침입한다. 또, 북부에서는 이란과 동맹을 맺은 쿠르드인 세력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어 무장투쟁을 개시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중동 전역에 파급하는 것을 무서워한 미국은 1984년에는 이라크와 국교를 회복해, 1988년까지 거액의 무기 공급 및 CIA에 의한 정보 제공을 실시했다. 이 시기, 중동에 석유 이권을 가지는 영국이나 프랑스, 그리고 카프카스 지방 등에 많은 이슬람교도를 안고 있던 소비에트 연방 이라크에 무기 원조를 시작으로 하는 지원을 실시하였다. 결국 1988년 8월 20일에 이란 측이 정전을 수락하여 전쟁은 끝났다.
한편, 이 전쟁이 한창이던 1982년에, 이라크 중부 두자일 마을을 사담이 시찰하던 중에 이란의 지원을 받은 반체제파 조직인 다와당의 공작원에 의해 암살 미수가 일어나자, 그 보복으로서 두자일의 주민 180명 이상을 화학무기로 학살하였다(두자일 사건).
top left: Military voluntarily use of children in iran-iraq war in iranian fronts top right: Massacre Iranian Civilans by Iraqi Troops at first of Iran-Iraq War. middle left: A port quarter view of the guided missile frigate USS STARK (FFG-31) listing to port after being struck by an Iraqi-launched Exocet missile on the 17th of May 1987 middle right: Mujahedin was killed in Operation Mersad by Pasdaran in Kermanshah below left: In re-taking Khorramshahr, the Iranians captured some 19,000 soldiers from a demoralized Iraqi Army in 1982 below right: Army of the Guardians of the Islamic Revolution & Islamic Republic of Iran Army used many zu-23 in Iran-iraq war.
95,000 Iranian child soldiers were made casualties during the Iran–Iraq War, mostly between the ages of 16 and 17, but a few even younger than that.
스커드 미사일이 이란의 한 초등학교에 떨어져 40명 가량의 어린이가 희생됨(좌) 그리고 이란-이라크 전쟁, 화학전의 결과(우)
5. 쿠웨이트 침공과 걸프전쟁(1990.8.2-1991.2.28)
이라크는 막대한 전쟁비용에다 저유가로 인한 국고수입 저하까지 더해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쿠웨이트가 이런 이라크의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석유생산을 늘려 국제유가를 하락시키자, 또다시 즉흥적인 판단으로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를 침공, 병합을 선언한다. 그러나 미국을 시작으로 하는 국제사회의 반발을 받아 1991년. 1월 16일의 걸프 전쟁으로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군에 패퇴했다.
1990년 8월 2일부터 1991년 1월 17일까지의 기간을 사막 보호 작전이라 부르는데 이 기간 동안 미국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어하고 다국적 연합군을 편성하였고, 1991년 1월 17일부터 종전까지를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이라 부르는데 이 기간이 다국적 연합군의 전투 기간이다. 이 전쟁이 페르시아만 전쟁, 제1차 걸프 전쟁, 쿠웨이트 전쟁, 제1차 이라크 전쟁, 또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이라크 전쟁이라는 용어로 인식되기 전까지 이라크 전쟁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주도 국가는 영국,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이집트였다.
패전 직후의 혼란을 틈타 국내의 반체제 시아파가 정권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시아파가 기대한 미국의 지원은 없었고, 사담 후세인 정권은 진압에 성공한다. 사담 정권은 반역자에 대해서 혹독한 보복을 가하였다.
6. 이라크전쟁과 후세인의 몰락
1977년 이후 잇단 전쟁과 흉년으로 세금 수입도 줄고 국가 재정은 악화, 탕진되었다. 또한 UN의 결의에 의해 쿠웨이트가 독립하면서 세수도 줄었고 이는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손해가 돌아갔다. 걸프 전쟁 직후부터 민심이 이반되기 시작하였고, 후세인 퇴진 운동이 벌어졌으나 그는 이를 모두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그러나 2000년 이후 퇴진 운동 무력 진압을 미국과 서방 등에서 문제 삼기 시작한다. 2000년부터 후세인은 서방 세계와의 화해 제스처를 취했지만 2001년의 911 테러 사건으로 그의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911테러 후 미국은 알 카에다를 지원하고 있다고 하여 사담 후세인 정권의 이라크에 강경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2002년 1월,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를 이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함께 악의 축 국가라고 비난했다.
2002년부터 2003년 3월까지, 이라크는 유엔 감시 검증 사찰위원회의 무기 사찰을 받으면서, 미국에 의한 무력 공격의 위기에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사담 정권은 강경한 자세를 바꾸지 않고, 9·11 테러에 대해서도 사담은 연설로 「미국이 스스로 부른 것이다」라고 하여, 테러를 비난하는 대신에 과거의 미국의 중동 정책에 원인이 있다고 비판했다.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유엔 안보리 결의 1441호를 근거로서 이라크 전쟁을 개시하였다. 제2차 걸프전쟁 또는 이라크 자유 작전(Operation Iraq Freedom)이라고도 하며 2011년 12월 15일 종전되었다.
2003년 3월 17일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에게 48시간 내에 이라크를 떠나지 않으면 군사공격을 단행하겠다'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또 "미국은 지난 1991년 걸프전 당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채택한 결의를 근거로 자국 안보를 확고히 하기 위해 주권국가로서 무력사용 권한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미국과 기타 국가들이 수집한 정보들에 따르면 이라크 정권은 치명적인 살상무기들을 지속적으로 보유해 왔으며 이들을 은폐하고 있다"며 "유엔 사찰단과 언론인을 포함해 이라크 내 머물고 있는 모든 외국인은 안전을 위해 이라크를 즉각 떠나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라크 지도부는 다음 날인 18일 부시 대통령의 최후통첩을 공식 거부했다고 이라크 국영 알 샤바브방송이 보도했다.
2003년 3월 20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최후통첩 시한을 2시간15분 넘긴 19일 오후 10시15분(이라크시각 20일 오전 6시15분, 한국시각 20일 낮 12시15분) TV로 생중계된 연설에서 “이라크를 무장해제하고 그 국민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 개시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미국은 이번 작전명을 ‘이라크 자유 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으로 명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첫 번째 공격은 선별적인 군사 목표물에 대한 공격”이라고 밝혔다.
징병제로 100여 만 명이 넘는 이라크군은 수적 우세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했고, 미, 영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가 전쟁 시작 21일째인 4월 9일(현지 시각) 사실상 함락되었다.
그리고 2003년 12월 13일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자신의 고향인 티크리트 인근 지하에 땅굴을 파고 숨어 있다가 미군에 체포됐다. 이는 같은 해 4월 후세인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종적을 감춘 뒤 약 8개월 만의 일이었다.
2004년 7월 1일 그의 죄에 대한 첫 재판이 열렸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첫 재판을 TV를 통해 지켜본 이라크인들은 분노와 동정 등이 뒤섞인 반응을 보였다. 후세인이 1988년 5000명의 쿠르드족을 학살한 북부 할라브자의 주민들은 한목소리로 ‘복수’를 부르짖었다. 키르쿠크 출신인 한 쿠르드족은 후세인이 젊은 판사 앞에 서 있는 광경을 “아름다운 정의”라고 표현했다. 후세인의 사촌 알리가 지시한 공격으로 자녀 6명을 잃었다는 사람은 “희생자들 앞에서 재판하라”고 주장했다.
후세인의 지지세력인 수니파 국민들은 “후세인은 이라크를 해치려는 사람들만 공격했다”고 항변하며 동정했다. 그의 고향인 티크리트의 한 식당 종업원은 TV를 보고 눈시울을 붉히며 “후세인이 저런 꼴을 당하는 걸 보느니 죽는 게 나았다”고 말했다. 수니파가 다수 거주하는 라마디 주민도 “최소한 후세인 시절엔 안전했다”며 “사담 시절이 더 살기 좋았다”고 비판했다.
7명의 다른 피고와 함께 이날 법정에선 사담 후세인 대통령. 이름 직업 등을 묻는 판사의 질문에 "불공정한 이 법정에서 답변할 수 없다. 이라크 대통령으로서의 헌법상의 권리를 사용하겠다"라고 말한다.
재판 당시, 1982년 시아파 두자일 마을 주민 143명 학살사건으로 희생된 자들의 사진을 들고 나와 ‘사담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후세인의 고양 티크리트에서는 주민들이 후세인 사진을 들고 나와 ‘후세인은 우리의 합법적인 대통령’이라고 구호를 외치며 미국의 지원 하에 진행되는 재판을 비난하고 있다.
2006년 11월 5일 1심 재판에서 시아파 무슬림 학살에 대한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며, 사담은 "나는 사형당하는 것이 절대 두렵지 않다. 이란과 손잡으면 안되며, 경계해야 한다." 고 말하였다. 이후 항소했으나 이라크 최고 항소법원은 사형을 확정하여 2006년 12월 30일 수도 바그다드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시신은 31일 고향인 이라크 북부 티크리트 부근에 매장됐다. 그의 사형은 이라크 형법이 사형을 금지한 만 70세를 4개월 앞두고 집행됐고, 처형 장면을 담은 동영상은 인터넷에 유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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