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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메이링과 그녀의 자매들

산풀내음 2017. 10. 21. 21:28

쑹메이링과 그녀의 자매들

 

"나에게는 세 딸이 있다. 하나는 돈을 사랑했고 또 하나는 권력을 사랑했으며, 다른 하나는 중국을 사랑했다(有三個姉妹 一愛錢 一愛權 一愛國)"

 

홍콩의 여류 영화감독인 장완정(張婉婷) 1997년작 영화 <송가황조(宋家皇朝)>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된다. 화교 출신의 저장(浙江)성 재벌로서 쑨원(孫文)의 혁명자금을 담당한 쑹루야오(宋如耀)의 세 딸 중 돈을 사랑한 첫째 아이링(藹齡)은 산시(山西)성 최대 금융부호였던 쿵샹시(孔祥熙)와 결혼하였으며 중국을 사랑한 둘째 칭링(慶齡) 27살이나 많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중국 혁명의 아버지인 쑨원과 결혼하였으며 권력을 사랑한 막내 메이링(美齡)은 국민당 총통 장제스(蔣介石)와 결혼하였던 것이다.

 

남편들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쑹()씨 세 자매의 운명도 엇갈렸다. 항일전쟁 발발 뒤 1942 1월 전시수도 충칭(重慶)에서 함께한 쑹씨 세 자매. 왼쪽부터 메이링, 아이링, 칭링.

 

특히 3세기에 걸쳐 신해혁명과 청나라의 멸망, 국공합작, 항일운동,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열, 국공내전, 중국과 대만의 분단, 중국과 대만의 현대화 과정 등을 모두 지켜본 쑹메이링은 그야말로 중국 근현대사의 산 증인이었다.

 

쑹메이링은 1897 3 23일 하이난(海南)에서 태어나 선진문명에 일찍 눈 뜬 아버지의 지원으로 1910년 열세살의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 길에 오른다.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쑹메이링은 서구화된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고, 스스로내 몸과 정신에서 유일하게 동양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얼굴뿐이다고 말할 정도로 언어에서부터 사유방식까지 완전 서구화된 문화를 체득하고 1917년 중국으로 귀국한다.

 

귀국 후 각종 사회활동을 하던 쑹메이링은 1920년 당시 황포군관학교 교장이던 장제스(蔣介石)를 만나게 된다. 탁월한 재능과 야심을 가진 쑹메이링과 비록 아이 셋의 유부남이었지만 새로운 중국의 지도자로 등장한 장제스의 만남은 11년의 나이 차이와 주변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국 1927 12 1일 결혼으로 이어진다.

 

특히 둘째 쑹칭링의 반대가 심했는데, 그녀는 소금장수 집 아들을 가족으로 받아 들일 수 없다. 교회 문턱에도 가 본 적이 없는 흉악한 사람이다. 게다가 군인이다라며 강한 반대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달리 첫째 쑹아이링은 중국은 짱제스의 천하가 될 테니 두고 보라며 쑹메이링에게 장제스와의 결혼을 권했다고 한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이 대만에 정권을 세운 이후 쑹메이링은 남편을 따라 대만으로 건너가 퍼스트 레이디로 활약한다. 그러나 둘째 언니인 쑹칭링은 중공 정부를 찬동하면서 중국에 남게 되는데, 70년대 전후에는 대만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자매 대결을 벌여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1975 4 5일 남편 장제스가 사망하자 쑹메이링은 그 해 9월 대만을 떠나 미국 뉴욕에 정착하게 된다. 미국 생활 초기 그녀는 대만과 미국과의 유대강화에 힘쓰면서도 대만의 정치문제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녀는 1986년 장제스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대만을 방문하기도 하였으며 1991년 이후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그림 수집 등으로 소일하며 조용하게 지내왔다.

 

쑹칭링(쑨원의 처, 왼쪽 두번째)은 장제스가 동생 쑹메이링과 결혼한 후에도 장제스를 싫어했다. 1926 8월 난징에 조성한 중산릉에 쑨원의 영구가 도착한 날에도 국가 원수나 다름없는 장제스가 앞에 나서지 못하게 했고, 장제스는 군말 없이 그녀의 요구에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