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明)을 망하게 한 환관 위충현 (魏忠賢)
자고로 왕은 궁궐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을 하였기에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항상 곁에서 함께하는 환관, 소위 내시의 영향력이 경우에 따라 그 정도가 지나쳐 왕권의 존립까지 흔드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 역사를 보면 이런 환관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 국정을 농단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후한시대와 명 말기가 가장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명의 흥망성쇠를 좌지우지하여 그 결과 명의 멸망을 부채질 한 대표적 인물로 환관 위충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위충현에 대하여 이야기하기에 앞서 명조 말기에 환관이 정치의 전면에 들어서게 되는 배경부터 살펴보자.
명나라가 건국된지 200년쯤 지난 만력제(萬曆帝, 13대 황제로 神宗, 1563 ~ 1620)때부터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만력제는 1572년 10세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당시는 장거정이라는 명망이 높은 재산이 그를 보필하였기에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만력제가 제위에 오른 지 10년째 되던 해 장거정이 세상을 떠났고, 그동안 기를 펴지 못했던 반대파들은 입을 모아 장거정의 비리를 들추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엄격한 훈육으로 자신의 소리를 제대로 내어보지 못했던 만력제에게도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만력제는 장거정의 사후 정사는 완전히 팽개치고 주색에 빠지기 시작한다. 당연히 주색을 누리기 위하여는 돈이 필요하였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각종 세금을 신설하여 백성의 고혈을 짜내었다. 이와 더불어 고관과 환관들도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가 되어갔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만력제는 아부하는 자를 재상에 앉혀 놓고 오로지 치부에만 열성을 보였다. 이는 결국 환관들이 정치세력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고 한편 당시 세금 징수에 반대하는 각종 민란들은 후일 명을 몰락시키는 이자성의 난의 씨앗이 되었다.
만력제는 정비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고 후궁에게서 5명의 아들이 있었다. 후궁 왕씨 소생인 주상락이 장자이었지만 만력제는 3남이자 주상락의 이복동생인 주상순을 총애하였다. 그래서 만력제는 환관들의 도움을 받아 주상순을 태자에 책봉하려 하였고 조정에서는 이 문제로 인해 정쟁이 끊이질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에서 차남인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청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에도 장자인 그의 태자 책봉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한 동림당의 반대로 인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은 허락되지 못하기도 했다.
결국 주상락이 20세의 나이로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제위 48년만인 1620년에 만력제가 죽자 주상락이 명의 14대 황제 태창제(泰昌帝, 光宗, 1582 ~ 1620)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즉위 29일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누구도 정상적인 죽음이라고 여겨지지 않았고 이후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격렬한 당쟁만이 남게 되었다.
태창제가 죽고 그의 장자인 주유교가 어린 나이에 황위에 즉위하는데 그가 명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천계제(天啓帝, 熹宗, 1605년 ~ 1627년)이다. 그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즉위했을 때 글을 모르는 까막눈의 상태였다고 한다. 자신의 문맹에 콤플렉스가 있었기 때문에 후에 숭정제가 되는 동생 주유검의 교육에는 많은 신경을 썼다고 전해진다. 천계제는 1620년 재위 때부터 1627년 23세의 나이로 갑자기 요절하기까지 환관 위충현에게 정치를 모두 넘겼고, 위충현은 전횡을 일삼아 국정을 농단하였다.
위충현(魏忠賢, 1568~1627)은 1568년 하북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위사(魏四)였다가 입궁 후 이진충(李進忠)으로 바꾸었고 다시 위충현으로 개명했다. 도박으로 인한 빚으로 도망 중에 있던 그는 스스로 관가에 자수하여 궁형, 즉 거세형을 받았다. 남자 구실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만력제 재위기간 중 궁에 입궐했다. 이때 성도 이씨에서 위씨로 바꾸었다. 궁중에 환관으로 들어간 그는 주유교(천계제, 희종)의 유모 객씨(客印月)와 가까이 지냈다.
위충현 상
주유교는 생모를 일찍 여의고 유모의 손에서 성장하였고 이후 각별한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유모 객인월은 40대의 나이에도 20대로 여겨질 만큼 미모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객씨는 단순히 천계제를 돌보는 위치가 아니라 같이 유희를 즐기는 관계였다. 단순히 유모라기 보다는 천계제의 총애를 바탕으로 천계제를 어린아이를 다루듯이 주무르는 여자였다. 마치 황후처럼 가마를 타고 궁을 드나들며 집은 화려하게 꾸며졌고 많은 종을 거느렸다. 자신의 측근들을 궁에 들였고 그들은 객씨를 받들었다. 객인월의 권력과 만행의 정도는 천계제의 아들들이 생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그녀는 황자를 임신한 궁녀를 굶겨 죽이기까지 했다.
객인월의 숨겨놓은 내연남이 바로 환관 위충현이었다. 사실 고자가 된 환관이라 할지라도 고환만 제거한 경우에는 발기가 되기 때문에 성관계를 할 수 있다. 다만 고환이 없는 관계로 보통의 남자가 사정할 때에 느끼는 쾌감은 없다고 한다. 환관이 아내를 맞은 경우는 조선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위충현은 천계제가 즉위하는 해에 환관의 최고위직인 사계감(司禮監)의 병필태감(秉筆太監)의 자리에 오른다. 이 자리는 조정에서 올라온 건의를 받아들여 그것을 황제의 정식명령으로 확정지을 때 붉은 묵으로 비준을 표시하는 직책이었다. 요즘으로 본다면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직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만약 황제가 부재중이거나 정사에 소홀할 때는 환관인 병필태감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에 더하여 위충현은 스스로 비밀경찰 조직인 동창의 책임자도 겸하였다. 그리고 동창을 통해 피비린내 나는 검거와 탄압을 자행한 것이었다.
천계제의 총애를 업고 권력을 장악한 그는 황제가 더욱 사치와 방탕에 빠지도록 애썼다. 동시에 그는 주변에 붕당을 결성하고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를 동림당은 내시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로 엄당(閹黨, 엄은 환관을 의미)이라고 했다. 뿐만아니라 자신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배양하기도 했다. 거의 모든 상소문은 황제의 손에서 처리되지 않고 위충현에 의해 결재가 이루어졌다. 그가 외출할 때는 사대부들이 길에 배열하여 절했으며, 모두 큰 소리로 『구천살까지 사십시요!』라고 외쳤다. 만세는 황제에게만 할 수 있는 것이라 구천세로 만족하였던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624년 동림당(東林黨)사건이 일어났다.
다시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명말 당시 황제의 왕위를 누가 계승하느냐를 둘러싸고, 지배층 내부의 의견이 갈리고 그들 사이에 자연스레 붕당이 형성됐다. 약 20여년간 계속된 논쟁에서 정치적 이슈로 시작됐던 왕위계승의 문제는 선과 악의 싸음으로 발전했다. 논쟁에서 이긴 당은 선이고 패배한 당은 악이었기 때문에, 타협은 있을 수 없었으며 오직 승리만을 목표로 각 붕당은 총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중에 동림서원을 중심으로 개혁정치를 외치는 동림당이 있었다. 그들은 만력제 당시 개혁정치를 선도했던 장거정의 후예로 권력 이양을 주장했으며, 이같은 주장은 황제의 비위를 거슬렀다. 그외에도 조세수입을 증가시키기 위해 궁중이 환관을 파견하여 광세, 즉 소금에 대한 세금징수를 독려하자 동림당은 거세게 반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만력제 당시 3남인 주상순의 세자 책봉을 막고 장자인 주상락을 세자에 책봉시키고 그를 황제로 만들면서 정치의 중심으로 부각하였다. 주상락이 급사하고 주유교가 황제에 올랐지만 그 당시에는 여전히 상당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권력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환관 위충현의 입장에서는 동림당을 몰아내야만 진정한 권력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상당한 권력을 쥐고 있는 동림당을 일순간 제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위충현은 황제의 유모이자 여자였던 객씨를 이용한다. 객씨를 통해 동림당인들에 대하여 나쁜 말들을 하게 하였고 이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천계제는 동림당인들을 점점 멀리하게 되었고 위충현은 자연스럽게 그들이 차지했던 위치를 대체하게 된다. 그리고 동림당과 대립 관계에 있었던 어쩌면 동림당으로부터 제거되었던 인물들이 위충현의 엄당으로 모여 들었고 따라서 엄당의 권세는 급격하게 성장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1624년 동림당의 양련이 먼저 위충현의 죄상 24개 항목을 들어 탄핵하자 많은 사람이 이에 호응하였다. 하지만 위충현은 우선 동림당인의 명부를 만들어 이들을 당시 금서였던 수호전에 등장하는 108명의 양산박호한들과 매치시키면서 대반격을 가한다. 위충현은 동림당인에게 없는 죄목을 뒤집어 쉬어 짧은 기간 동안 대부분을 죽여 없앤다. 당시 양련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보면 양련은 몸이 반쯤 땅에 묻혀 있었고 왼쪽 귀에는 철못이 박혀 있었으며 두개골은 깨지는 바람에 얼굴의 형태을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위충현은 개인우상화 작업을 더욱 강화한다. 반여정은 황조우에 살아있는 위충현을 제사 지내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그 규모가 엄청났다고 한다. 이것을 시작으로 전국의 관리와 상인들도 이를 본받아 위충현의 생사를 지었다고 하고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영원한 권력이라는 것은 없는 법 천계제가 병으로 눕게 되고 스물셋의 나이에 죽고 만다.. 천계제는 죽을 당시 유모 객씨의 만행으로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 주유검이 즉위한다. 그가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 毅宗, 1611-1644)다.
숭정제는 위충현을 궁에서 축출하여 봉양으로 귀양을 보내는데 위충현은 도중에 부성이라는 곳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숭정제는 자살한 위충현의 시체를 난도질하게 하고 그이 일족들도 처형시켰다. 그리고 유모 객씨도 곤장을 맞아 죽고 그 가산은 몰수 되었다.
위충현이 죽은 후 동림당은 명예를 회복했되었지만 당쟁은 지속됐고, 특히 환관세력과 동림당 간의 당쟁은 끊이지 않아 마침내 만주족에 의해 명의 수도가 함락되고 그 유신들이 남쪽으로 피신하여 남명(南明)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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