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나는 역사이야기/역사 한눈에

태국 반정부 시위

산풀내음 2017. 2. 19. 14:35

태국 반정부 시위

 

절대왕정 국가였던 태국은 1932년에 입헌군주국이 됐다. 태국은 국토 면적이 남한의 다섯 배나 되고 평야가 많아서 예로부터 쌀 생산이 풍요로웠다. 고무와 석유, 광물 같은 자원도 비교적 풍족하다. 20세기 초·중반 산업화를 이루는데 실패하면서 2차 산업인 제조업이 발달하지 못했고, 그 결과 농업 같은 1차 산업과 3차 산업인 관광업 등에만 의존하는 기형적인 산업구조를 갖게 됐다.

 

역사가 짧은 만큼 민주주의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정치권의 부패가 극심하고 정치 세력간의 반목과 대립, 정쟁도 심하다.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니 도시와 농촌, 부자와 가난한 이들의 경제적 격차가 극심하고 이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 지역간 계층간 갈등의 골이 깊다. 문제는 이런 현실 속에서 먹고 살기 급급한 국민들 대부분이 정치에 매우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한쪽에선 반정부 시위대와 정부가 돌을 던지고 최루탄을 쏘며 격하게 대치하고 있지만, 시민 대부분은 시위 현장 근처에만 가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방관만 하고 있다.

 

태국 반정부 시위사태의 본질은 20069월 쿠데타로 실각한 탁신 친나왓 (Thaksin Shinawatra, 1949. 7. 26. ~ ) 전 총리를 지지하는 세력(Red Shirt, 농민, 도시 노동자 등 비기득권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간(Yellow Shirt, 도시민 등 기득권 세력)의 대립이다. 재벌 출신인 탁신 전 총리는 권력을 이용한 탈세와 비리 혐의가 드러나 실각한 뒤 2008년 실형을 선고 받고 해외에 도피 중이다. 그런데 농어촌 주민들과 도시노동자들 사이에선 여전히 엄청난 인기와 지지를 누리고 있는 것은 재임 시절 국가 재정을 지방정부에 나눠줘서 빈민 지원 사업을 벌이는 등 저소득층을 위한 정책을 많이 폈기 때문이다.

 

Thaksin Shinawatra

Picture of the morning after the Thailand Military Coup of September 2006

 

2006 9월 타이에서 일어난 쿠테타로 탁신 전 총리가 실각한 후 국민들이 반발하자 군부는 다시 총선을 실시하였는데 탁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승리하여 2007 12월 친()탁신파(Red Shirt)들이 재집권하게 되었다.

 

이에 반()탁신파(Yellow Shirt)들이 공항점거 등으로 탁신파를 몰아내려 실력을 행사했고 그 과정에서 국왕에게 불경한 행동을 보인 친탁신파 정치인들이 반탁신파 정치인들의 함정에 빠져 재판에 회부되거나 정치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면서 결국 실각하거나 반탁신쪽으로 가게 되었고 타이 정국은 혼미상태에 빠졌다. 타이 정국이 혼미해진 틈을 타 타이왕족, 기득권세력의 이익을 잘 대변할 수 있고 언변술이 좋다는 아피싯 웨차치와(Abhisit Vejjajiva, 1964. 8. 3. ~ ) 2008 12 17일에 수상자리에 취임하였다.

 

아피싯이 수상으로 있으면서, 철저하게 태국 재벌, 군부, 왕족 등 태국 기득권세력을 위한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태국민 다수를 이루는 빨간색셔츠들은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그러는 와중에 그들의 희망인 탁신 수상이 해외에서 힘든 생활을 하는 것은 물론, 재산까지 국가가 몰수하려 하자 국민들 대다수는 불만이 가중되었다.

 

Abhisit Vejjajiva

 

결국, 2010 3, 때만을 노리던 빨간셔츠들이 결집을 했고, 그들은 처음에는 평화적 시위를 하면서 "의회해산, 조기총선실시"를 외치다가, 점차 주요 거점 지역을 점거하고 아피싯 총리에게 압박을 가했다. 그러자, 아피싯은 2010 12월 정도 총선을 실시 할 것이니 시위를 해산하라는 원칙 천명과 함께 시위대가 해산을 하지 않으면 강경진압을 할 것이라고 수 차례 경고했다. 결국, 시위대가 아피싯 총리의 수 차례의 경고를 무시하자 정부는 군인을 동원해서 강제해산을 시도 했고 이에 레드셔츠가 군인들과 충돌하면서 결국 시가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결국 5월까지 지속된 시위와 투쟁으로 92명의 목숨이 희생되었고 2000여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지만 시위대는 의회 해산 및 조기 총선을 이끌어 냈다. 그 결과 2011 7월 조기 총선에서 망명 중인 탁신 친나왓의 막내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이 총리에 선출되었다.

 





 

태국의 첫 여성 총리로 올라 선 잉락 친나왓 (Yingluck Shinawatra, 1967. 6. 21. ~ ) 총리(2011. 8. 5. ~ 2014. 5. 7.)는 대내외적 업무 처리를 순조롭게 잘 진행하여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배후에는 현재 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오빠 탁씬 전 총리가 있는 것이고 그에 의해서 모든 일들이 진행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반탁신파의 반발을 사고 있었는데 잉락 총리와 집권당이 한 발 더 나아가 2013년에 10월 탁신 전 총리를 포함한 정치사범들을 모두 사면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나섰다. 내놓고 탁신 전 총리를 불러들이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반정부 진영이 폭발했고 시위사태에까지 이르게 됐다.

 

Yingluck Shinawatra

 

이 사면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탁씬 전 총리가 자기의 모든 죄를 없이하고 고국으로 돌아 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친탁신파들의 시위 때 발포 명령을 내려 92명의 사상자를 내게 한 장본인인 아피싯 전총리와 쑤텝 전부총리의 죄도 사면 받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피싯과 수텝은 이 사면법 제안을 거부하였고, 2013 11 1일 사면법이 하원을 통과하자 사면법 반대를 위한 시위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11 11일에 상원에서 부결이 되어 사면법 자체가 시위의 주제는 더 이상 아닌 상태가 되었다.

 

이 사면법 반대 시위를 기회라 생각하고 이끈 인물이 바로 쑤텝(Suthep Thaugsuban, 1949 - ) 전 부총리인 것이다. 그 이유는 지난 시위 때의 92명에 대한 실질적 책임과 함께 기타 개인적인 비리 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위해서는 정권 창출 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Thailand opposition leader Suthep Thaugsuban marches with supporters in Bangkok.(2013.11.27)


 

반정부 시위 사태가 발생한 뒤 태국에선 시위대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와 언론, 전문가들도 현 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질타하며 개혁을 요구해 왔다. 이들은 여러 경로로 총리 사퇴와 의회 해산을 요구했다. 그 결과 의회 해산까지는 이미 이끌어 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이다.

 

잉락 총리 측은 2014 2월에 총선을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라면 선거를 통해 의회를 새로 구성하는 건 당연한 방식이다. 하지만 극심한 빈부 격차로 노동자와 농민, 도시 빈민들의 표가 훨씬 많은 태국 상황에선 선거를 치를 경우 탁신파인 여당이 다시 집권할 게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선거가 현 정권의 재집권을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다 보니 반정부 진영에선 '국민회의' 구성을 요구했다. 선거 없이 적당한 사람들을 뽑아서 임시 의회를 만들고 이들이 헌법도 고치고 개혁안도 만들고 총리 후보도 결정해서 왕이 임명하자는 요구이다.

 

2013 12 9일 잉락 총리는 의회 해산 및 2014 2월 조기 총선을 선언한다. 이 선언 이후 반정부 시위는 더욱 확산되어 22일 시위에는 10만면 이상이 집결하였다. 시위대는 2014 1 13일부터 방콕 셧다운 시위를 시작하였고, 이후 2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투표 방해로 결국 조기 총선은 무효로 돌아갔다. 셧다운 시위는 2014 3 3일까지 지속 되었으며 반정부 시위대 지도자인 수텝 타욱수반 전 부총리는 "오는 3일부터 방콕 시민들에게 도로를 돌려주겠다"고 밝혔다. 시위대는 기습 총격과 폭탄 공격이 늘어나 피해자가 속출하자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201311월부터 시작된 반정부 시위로 인해 2014 3월까지 700명 이상이 다쳤고 시민과 어린이, 경찰을 포함해 23명이 숨졌다. 나아가, 태국 헌법재판소는 2014 5 7일에 잉락 총리의 권력 남용을 인정해 해임시켰다.

 



 

무효화된 2월 총선을 대신해 7 20일 총선이 예정되었지만, 2014 5 20 19번째 군사쿠데타의 발생하였다. 이날 쁘라윳(Prayuth Chanocha) 태국군 사령관은 TV를 통해 정치적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 조치는 군사쿠데타는 아니라고 못 박았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이틀만인 22일에 군은 공식적으로 군사쿠데타를 선포하고 정부기관들을 군의 통제 하에 둔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틀간 대립하고 있는 정파간 형식적 대화를 추진하고, 22일 이 대화가 실패로 돌아갔다고 선언하면서 공식적으로 쿠데타를 만방에 선포하는 절차를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