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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탄생과 붕괴

산풀내음 2016. 11. 14. 21:47

소련의 탄생과 붕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러시아어: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 СССР), 약칭 소비에트 연방 또는 소련(蘇聯)1922 12월 30부터 1991 12월 25까지 유라시아 북부에 존재하였던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였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명칭은 소비에트 (러시아어: Совет)에서 나왔는데, 이는 러시아어 '평의회' 또는 '노동자-농민 평의회'를 뜻한다.

 


1. 아르메니아 2. 아제르바이잔 3. 벨로루시 4. 에스토니아 5. 그루지야 6. 카자흐 7. 키르기스 8. 라트비아 9. 리투아니아 10. 몰도바 11. 러시아 12. 타지크 13. 투르크멘 14. 우크라이나 15. 우즈베크

 

 

1) 소련의 탄생

 

1917 러시아 2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차르 니콜라이 2가 퇴위하였고 러시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혁명 이후 성립한 임시 정부는 점진적인 개혁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14 7월 28 시작된 제1 세계 대전, 특히 독일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또한 어린이들이 먹을 우유가 모자랄 정도로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1917 2월 혁명

 

1917 11월 7레닌의 지도 하에 10 혁명이 일어났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적위군을 조직해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장악하였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과 외국 열강이 볼셰비키를 공격해 러시아 내전이 일어나자 백군 및 외국 열강의 군대에 대항하려고 레프 트로츠키는 적위군을 적군으로 개편했다. 적군은 외국 열강과 백군을 쳐부수고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했으며, 모든 반대파를 숙청해 볼셰비키가 러시아를 지배하게 되었다.

 

레닌과 10월 혁명

적군의 창설자, 레프 트로츠키() 1917 10월 혁명의 주역인 적위대()

 

이어 1922 12월 30의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연합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이렇게 레닌은 세계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였으나 1918년 암살 미수에 의한 후유증과 누적된 과로, 여러가지 질병이 겹치면서 몸져누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러자 레닌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트로츠키와 스탈린이 격돌하였다. 스탈린의 22살의 젊은 시절부터 직업 혁명가가 되어 공산주의 혁명의 길에 들어선 후 1917년 레닌의 ‘4월 테제를 지지하면서 볼셰비키 혁명에 참여하여 레닌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1919년부터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임명 받을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레닌과 스탈린

 

그러나 레닌은 스탈린의 지나치게 과격한 성격을 우려하였고, 더욱이 자신이 병석에 눕자 자신을 능멸하기까지 하는 태도에 불만을 가져 죽기 전에 스탈린을 서기장직에서 해임시킬 것을 유언으로 남기기까지 한다. 그러나 1924 1 21일 레닌이 뇌일혈로 사망하였지만, 당시 비밀경찰(체카)과 당권을 완전히 장악한 그에게 대적할 자는 없었다.

러시아혁명과 적백내전을 치룬 트로츠기가 스탈린을 건제하고자 하였지만 결국 스탈린에게 져, 1927년 국외로 추방당하게 된다. 추방당한 트로츠키는 반소, 반혁명 운동을 벌이며 스탈린을 계속 자극하다가 결국 1940년에 멕시코에서 암살당하고 만다.

 

멕시코에서의 트로츠키

 

 

2) 소련의 확장

 

1933 1아돌프 히틀러독일의 정권을 잡았고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중앙유럽 일대를 독일인의 생활권(독일어: Lebensraum 레벤스라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스탈린중앙유럽 국가를 공산화하여 위성 국가로 두고 싶어 했는데, 소련과 독일은 결국 중앙유럽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충돌하게 된다.

 

1939 8월 소련과 나치 독일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그 해 9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도 9 17일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의 영토를 점령하였다. 이어 소련은 1940년에는 핀란드의 영토를 빼앗았고 발트 3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1941 6월 22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대조국전쟁)이 발발했다. 1945 4월 30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함락시키고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소련은 동부 독일을 점령했다.

 

 

소련의 중앙유럽 점령 이후 중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연이어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 차츰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되어갔다. 이들은 1955바르샤바 조약 기구(Warsaw Treaty Organization; WTO, 소련과 그 위성 국가인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를 결성,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에 맞서려고 했다. 미국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마셜 플랜을 발표,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도우려고 했다. ,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창설하여 이 과정에서 양 진영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냉전이 시작되었다.

 

Signing the Warsaw Pact

 

 

3) 소련의 붕괴

 

A.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정치국 1985 3 11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사망한 지 3시간 후 새 서기장으로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임명하였다. 그는 54세에 공산당 가입한 이후 소비에트 연방 정치국의 가장 젊은 일원이었다. 고르바초프의 목표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이후 침체소비에트 연방의 경제를 부흥하는 것이었다.

 

그는 1985부터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을 시행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해 하반기에 사우디와 미영간의 치킨게임으로 석유값이 폭락하여 세수가 크게 줄어버린데다가 1986체르노빌 원자력 사고가 터지면서 결국 소련의 경제는 회생 불가까지 가버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글라스노스트는 소련 체제 하의 온갖 비리와 범죄를 드러내어 소련 공산당과 소련 체제의 정당성에 흠집을 냈다. 한번 시장의 고삐가 풀리자 인플레이션을 막아낼 방법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고르바초프의 혁신 정책은 원래의 의도는 거의 이루지 못한 채 소련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붕괴를 초래했고, 억눌려 있던 민족주의가 발흥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1986 12월 라크비아에서 처음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소비에트 연방에서의 탈퇴와 민족국가로써의 자주독립,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환원 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B. 1989년 동유럽혁명

 

이런 가운데 동유럽혁명(Revolutions of 1989)가 발발한다. 동유럽 혁명의 전초가 된 사건은 1985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시작한 "페레스트로이카"이다. 이것은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와 경제의 경직을 완화하기 위해 시작했던 정치 개혁이다. 페레스트로이카에서는, 소련 최고 회의 매체에 공개, 소련 공산당의 동유럽의 공산당에 대한 통제 완화, 동유럽 이외의 국가와 긴장 완화를 내세웠다. 1988 3, 고르바초프가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했을 때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폐지를 선언했다. 이러한 페레스트로이카에 입각한 외교 정책은 "새로운 생각 외교"라고 불리고 있다.

 

그 페레스트로이카의 중에, 1989 상반기에 2개의 큰 사건이 일어났다. 1월 7 쇼와 천황의 사망, 6월 4 톈안먼 사건이다. 2개의 사건은 제2 세계 대전에서 냉전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나치 독일,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일당지배에 의한 억압을 받아왔던 동유럽의 민중을 분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989 6월 18, 공산당 지배하의 폴란드는 민주화 세력인 노동 조합 연대의 힘으로 민주적 선거가 실현되어 폴란드 통일 노동자 은 해체하고, 폴란드의 일당제(폴란드 인민 공화국)는 붕괴하였다. 그 후 6월 25 유고슬라비아의 일원인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포하고, 1992 보스니아도 독립을 선포하여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붕괴되었다. 불가리아에는 공산당 정부가 무너지고 불가리아 공산당불가리아 사회당으로 이름을 개명했다.

 

공산권 최초 자유 노조인 폴란드의 `연대'(Solidarity)’ 창설의 토대가 되었던 1980 8월 그단스크 파업위원회가 내건 21개 요구 사항이다. 자유노조설립, 검열 폐지, 정치범 석방 등을 골자로 한 요구사항은 나무판자 두 쪽에 페인트와 연필로 쓰여졌다. 자유노조의 저항운동 결과, 1989년 공산권에서는 처음으로 폴란드에서 민주주의식 선거가 실시되어, 노조의 전국위원회 의장이었던 레흐 바웬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8월에는 범유럽 피크닉이라는, 동독에서 헝가리까지의 종단 여행이 실시되었다. 이때 헝가리 공산당 정권이 10개월 혁명으로 무너지고 국경을 개방하자 헝가리에서 여행하던 동독 시민 수천명이 오스트리아로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범유럽 피크닉 중에, 헝가리에서는 공산당이 8월에 해체, 10월 23 새 헌법 (헝가리 공화국 헌법)이 시행되고,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 붕괴되었으며, 다당제를 기반으로한 헝가리 제삼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이 피크닉부터 3개월 뒤인 11월 9 동독, 에곤 크렌츠의 한 대변인이 생방송 중, 동독 시민들을 무마하기 위한 새 출입국 방침의 시행 일자를 묻는, 기자의 물음에 "베를린 장벽은 지금 당장 개방된다."고 대답한 것이 불씨가 되어 수 많은 시민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었고 결국 하루 뒤인 11월 10 베를린 장벽이 붕괴 되었다. 호네커는 실각하고 1990 10월 3에는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11월 17에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정부가 붕괴되었고, 12월 25에는 루마니아 혁명에 의해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처형되고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이 쓰러졌다.

 

루마니아 민주화 투쟁

차우셰스쿠 부부 처형

 

 

C. 1991 8월 쿠테타와 옐친의 등장

 

1991 8 19, 고르바초프에 반대했던 대통령 겐나디 야나예프, 총리 발렌틴 파블로프,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KGB 국장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와 기타 다른 고위 관계자들은 신 조약의 서명을 막기 위해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회"는 고르바초프를 크림 반도 포로스에 휴가를 빌미로 연금하고 정치 검열을 시작하며 페레스트로이카를 중지하려 시도했다. 쿠데타 지도자들은 신속하게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대부분의 언론 매체의 방송 중지를 선포했다.

 

쿠데타 지도자들은 시민들의 지지를 원했으나, 대부분의 공화국과 시민들은 민간 저항을 시작하고 모스크바에서는 전역이 형성되었다. 러시아 SFSR 대통령의 보리스 옐친은 쿠데타를 비난하고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수천명의 모스크바 시민들이 러시아 주권의 상징적 장소인 러시아 연방 의회와 보리스 옐친의 사무실인 모스크바 백악관에 몰려들었다. 쿠데타 지도자들은 옐친을 체포하는 데 실패하며, 반격을 받게 되었다. 쿠데타 지도자들이 보낸 특수부대들은 백악관 근처에 접근하지만, 바리케이드를 넘는 데 실패했다.

 

3일 후인 8 21, 쿠데타는 지도자들이 구금되며 붕괴하고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 복귀되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으며 연방이나 러시아도 중앙 명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1990년 당시 소련의 어려운 경제상황

공산당 보수파의 구테타 후 붉은 광장을 점령하고 있는 탱크들

쿠테타의 주역들

1991. 8. 19. 보리스 옐친이 최고회의 건물 앞에 있는 탱크에 올라가 강경파의 쿠테타를 비난하는 성명 발표

1991. 8. 20. 옐친을 지지하는 5만 명의 시민이 모스코바 정부에 집결

1991. 8. 시민들이 붉은 군대의 장갑차에 올라가 그들의 진군을 저지하고 있다.

1921. 8. 22. 러시아기를 흔들고 있는 병사들

1991.8. 22. 시민들이 KGB 창설자의 동상을 부수고 있다

1991. 8. KGB 내각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자택 연금을 당했던 고르바초프가 풀려나 정부 청사에 있다.

 

 

D 소련의 해체

 

8월과 12월 사이, 10개의 공화국들은 쿠데타의 공포로 독립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러시아는 크렘린을 포함하여 소련 정부가 남긴 것을 물려받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연방 붕괴의 최후는 1991 12 1일 열린 우크라이나 독립 투표에서 유권자들의 90%가 독립을 선택하며 우크라이나가 독립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SSR 3개 슬라브 국가 지도자들은 고르바초프의 연방을 대신하여 새로운 연방에 대한 토의를 열도록 합의했다.

 

1991 12 8,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도자들은 비아워비에자 에서 만나 벨라베자 조약으로 소련 멸망에 합의하고 독립 국가 연합(CIS) 창설을 이루어냈다. 고르바초프는 이를 위법한 쿠데타로 발표하지만, 이미 소비에트 연방 붕괴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벨라베자 조약은 소련 공화국 중 3개만이 서명된 이후 소비에트 연방을 해산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혹이 나왔다. 그러나, 12 21일 조지아를 제외한 소베이트 연방의 모든 공화국이 알마-알타 조약에 서명하며 소비에트 연방의 해산을 확인했다. 같은 날, 발트3국과 조지아를 제외한 소비에트 연방의 모든 공화국들은 CIS에 가입할 것을 합의했다.

 

1991 12 25일 아침, 고르바초프는 소련 서기장의 사임을 발표하고 연방 해체를 발표하면서 옐친에게 모든 권한을 인계했다. 그날 밤, 크렘린에서 마지막으로 소비에트 연방 국기가 내려졌다. 다음 날, 공화국협의회(소비에트 최고 회의의 사무실)은 공식적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인정하고 소비에트 최고 회의를 스스로 해산시켰다. 12 31, 러시아가 장악하지 않은 나머지 소비에트 연방의 기관은 활동을 멈추고 개별 공화국은 소련 정부의 역할을 가져왔다.


1991 12 25일 고르바쵸프의 사임 회견

크렘린 대궁전소비에트 연방의 국장 "CCCP"라는 글자()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러시아의 국장인 독수리 5개로 대체된 모습(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