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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이강석 사건

산풀내음 2016. 8. 21. 20:17

가짜 이강석 사건

 

 

가짜 이강석 사건으로 살펴본 자유당 시절 권력 제 3인자, 이강석
https://www.youtube.com/watch?v=UGsny1B2l0o&t=12s

 

1957 3 26. 이승만의 83세 생일이었다. 이승만은 생일을 맞아, 가족 한 명을 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것은 바로 아들. 이승만과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다. 이승만에게는 전처인 박승선 사이에 봉수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미국 체류중에 그만 병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승만은 양자로 이기붕의 아들을 지목하여 입적시켰다.

 

이기붕과 그의 아내 박마리아 사이에는 이화여중 재학 중 요절한 장녀 이강희와 장남 이강석, 차남 이강욱이 있었다. 이승만은 그중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입적시켰다. 당시 이승만의 후계자로 이기붕이 낙점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그것이 확실시되었다.

 

 

 

 

왼쪽부터 이기붕, 프란체스카, 이승만, 이강석, 박마리아(이기붕의 처)

 

 

 

이기붕 가족사진,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는 자신의 제자를 이용해 권력에 아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른쪽부터 시계 반대방향. 무초 주한 미국대사,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 콜트 미8군 부사령관. 이들을 초대한 박마리아는 자신의 출신 학교이자 교수로 있던 이화여대 여학생들을 불러 미국팝송을 부르게 했다.

 

 

알려진 것이 이 정도인데 박마리아는 또 무엇을 했을까???

 

이기붕은 1956 5월 부통령 선거에 자유당 공천으로 출마했다가 민주당의 장면에게 패배하였지만, 그해 제3대 민의원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고, 앞으로 있을 1960년 선거에서 다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 당선이 유력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남까지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되자, 이기붕의 서대문 집은 아예 '서대문 경무대'로 불려지게 되었다.

 

한국의 제1인자를 양아버지, 2인자를 친아버지로 둔 이강석의 위세는 막강했다. 정병준의 책 <청산하지 못한 역사>에 소개된 장면을 보자. 이강석은 백주에 정복 차림의 헌병을 구타하고 파출소의 기물을 부수고 다녀도 누구 하나 그를 고발하고 처벌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강석은 이승만의 양자가 된 직후 부정으로 서울대 법대에 편입해 서울대 법대생들이 4 9일 동맹휴학에 돌입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자 이강석은 서울대 법대를 중퇴하고 육군 사관학교로 재입학하여 12기로 졸업했으며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강석이 제3인자로서 그 권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얼마 후 '가짜 이강석 사건'이 벌어진다. 1957 8 21일 오전 6시부터 몰아친 태풍 아그네스가 경북 동해안 일대를 강타해 그 연안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다. 이 지역에 22세의 대구 출신 무직자 강성병이 나타났다. 그는 이강석 행세를 하면서 이 지역의 각급 기관장들을 농락하고 다녔다. 기관장들은 그에게 돈을 주고 아첨을 일삼는 추태를 벌였다.

 

덜미는 경북지사 이근식이 잡았다. 진짜 이강석의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짜 이강석 사건을 심판하는 대구법원에서는 법원 건립 후 최고 인파인 1천여 명이 몰려들었다. 판사 전용 출입문까지 들어선 방청객 사이로 법정에 들어가느라 판사의 법복이 찢어지고 법정 안에 있는 의자의 반이 부서졌다. 가짜 이강석은 10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의 법정 발언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돈만 있으면 언제라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의 세태가 아니냐?” "이번 체험을 통해 권력의 힘이 위대한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내가 시국적 악질범이면 나에게 아첨한 서장, 군수 등은 시국적 간신도배이다." "언젠가 서울에서 이강석이 헌병의 뺨을 치고 행패를 부리는 데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을 보고 한번 흉내내 본 것이며, 권력이 그렇게 좋은 것인 줄 비로소 알았다" (이상 박찬, 임영태의 책에서 발췌)

 

 

 

 

이강석은 195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포드베닌 보병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마치고 5 25일 귀국하였다. 그리고 1960 4 19일 독재자 이승만에 대해 민중들이 항거한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자, 이틀 뒤 이강석은 경무대에서 아버지 이기붕과 어머니 박마리아, 그리고 동생 이강욱을 권총으로 쏘아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했다.

 

 

 

 

 

이기붕 일가족 자살에 대해서 당시 곽영주가 이승만의 하야를 막기 위해 여론을 무마시키고자 그를 비밀리에 살해했다는 설이 있으나 알 수 없다. 공교롭게도 이강석이 이렇게 자살한 3년 뒤인 1963, 가짜 이강석 강성병도 자살로 삶을 마무리해 죽음까지도 진짜를 따라가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연이 질겼던 진짜 이강석과 가짜 이강석. 이들이 만들어낸 블랙코미디가 아직까지도 흐릿하게 남아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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