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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의 역사

산풀내음 2016. 8. 15. 09:42

빨치산의 역사

 

1) 빨치산이란?

 

빨치산이란 여수·순천 사건의 잔류 반란 세력, 탄압을 받은 좌파 인사들, 6·25 전쟁 후 인민군 잔류 세력 등이 지리산 등에 입산하여 전개한 공산 게릴라를 이른다. 빨치산이 빨갱이로 통용되는 경우가 있으나 빨치산은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zan), 곧 노동자나 농민들로 조직된 비정규군을 일컫는 말로 유격대와 가까운 의미이다.

 

2) 역사적 배경

 

해방 후 남로당 활동에서 유격 투쟁을 배합하게 된 것은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비롯된다. 미군정 당국은 1947 8·15 해방 기념 대회의 옥외 개최를 금지시키고, 이를 구실삼아 남로당 부위원장 이기석 등 수많은 간부들을 구속했으며, 모든 좌익계 신문을 폐쇄하였다.

 

3) 여수·순천 반란사건

 

남로당은 1948 ‘2·7 투쟁 ‘5·10 선거 반대 투쟁을 통해 부분적인 무장 투쟁 전술을 채택했다. 4·3 제주 항쟁의 여파로 1948 10 19일 전라남도 여수, 순천에서 남조선국방경비대 반란 사건이 일어났고, 14연대는 반란 후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11월 하순에 유격 거점을 마련했다. 각 지역의 남로당 조직은 14연대 반란군이 주축이 된 지리산의 반란군과 합세해 곳곳에서 관공서를 습격했다. 한동안 전라남도 구례 지역에 국한되었던 관공서 습격은 11월 중순 이후 전라남도 곡성·광양, 전라북도 남원·무주·장수, 경상남도 거창·함양·산청·진주·하동 일대로 번져 갔다.


 

여순반란 사건에서 학살된 양민들

 

1949 3월 육군 본부는 호남지구 전투사령부를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약칭 지전사(智戰司)]와 호남지구 전투사령부로 개편하여 토벌 작전을 강화했다. 반란군 지휘자 홍순석(洪淳錫)과 김지회(金智會) 4 9일 남원군 산내면 반선리에서 토벌대에게 사살당했다. 주력이 와해됨으로써 5 9일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되면서 토벌 작전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일부 잔여 반란군이 있었고,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민간인 출신 유격대원들이 계속 충원됨으로써 유격대들은 1950 6·25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유격 투쟁을 전개했다.



여순사건 진압 후 부역자 처벌을 위해 시민들을 집결시킨 모습.

 


4) 투쟁 격화와 동계 대토벌 작전

 

잔류세력과 북한에서 지원된 유격대는 1949 9월에 산악은 물론 관공서나 군부대, 경찰서가 위치한 도시에 대한 대담한 공격 작전으로 나왔다. 이를 9월 공세 또는 아성 공격(牙城攻擊)이라 하며 9~10월 중에 25개의 대도시, 읍에 대한 습격이 강행되었다. 유격대의 강력한 투쟁으로 전라도와 경상도, 강원도의 일부 산악 지대는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고 불리며 대한민국의 통치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유격대 투쟁의 격화에 대해 이승만(李承晩) 정부는 1949 10 1일부터 11 30일까지 국민보도연맹 자수 기간을 설정하여 물리적 공격과 감시 체제 구축에 나섰다. 국민보도연맹은 30만 조직원을 포괄하고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반좌파 투쟁에 동원되었다. 자수와 밀고가 장려되자 많은 좌파들이 전향하면서 좌파 조직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로 인해 1949년 말에는 남로당의 거의 모든 당 조직들이 파괴되어 마비 상태에 빠졌다.

 

한국 정부는 1949 9월 말에 게릴라 근절과 지방 좌파 뿌리 뽑기에 나섰다. 이른 바 동계 대토벌 작전이다. 군경 토벌대들은 전략촌 건설 및 소진(消盡), 소개 작전(疏開作戰)을 폈다. 1949년 여름까지 매월 평균 3~4백 명을 기록했던 토벌에 의한 게릴라 사상자 수는 9월 이후 급격히 증가하여 8~1천 명까지 달했다. 군경 합동으로 진행된 1949 12월부터의 동계 토벌은 사살 365, 생포 187, 귀순 4,964명이라는 전과를 올리고 1950 3월에 막을 내렸다. 동계 토벌 작전은 무장 유격대에게 결정적 타격이 되었다. 한때 수천 명에 달했던 남한 유격대는 거의 완전히 붕괴했다.

 

5). 6.25 전쟁 중 빨치산 토벌 작전

 

인민군이 퇴각한 1950 9월 이후 인민군 패잔병, 구 빨치산, 인공 부역자 등이 모두 입산해 산간 지대 인민 유격대의 숫자는 급격히 불어났다. 한때 전국적으로 5~8만 명으로 추산될 정도였던 입산자 수는 일시 산중으로 피신했던 정규 인민군 병력 중 대부분이 북상 길을 택한 이후인 1950 10월 말에는 약 2 5천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10월 중순이 되어 11사단이 새로 창설되어 호남 지구와 지리산 지구의 토벌을 전담하게 되었다. 11사단이 토벌 작전에 들어가면서 내세운 작전 개념은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작전 지역의 산간 부락이 거의 소실되고 주민들은 고향에서 내몰렸다. 이 작전은 주민들의 반감을 키워 자진 입산자를 늘리는 역효과를 냈다. 1951 2 10~11일에 9연대 3대대가 저지른거창 양민 학살 사건도 그러한 무리한 작전의 수행 과정에서 빚어진 참사였다.

 

6) 대성골 전투와 빨치산의 붕괴

 

유격대의 전라북도 부대는 전라북도 운장산, 내장산, 회문산, 성수산, 장안산 일대에서 1,500~2,500명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박영발(朴永發)과 김선우(金善祐)가 지휘하는 전라남도 유격대는 백아산, 조계산, 백운산 일대에 약 2천 명 정도가 있었다. 토벌대의 주된 공격 목표가 되었던 전라북도 유격대와 전라남도 유격대는 이 작전으로 재기 불능 상태에 빠졌다. 토벌대의 주민 선무 공작과 전략촌 설치 등으로 유격대와 주민의 접촉이 차단되면서 유격대들은 보급 투쟁 명목으로 주민들을 습격했다. 이에 주민들이 등을 돌리자 점점 더 생존을 위한 반민간인적인 행동을 자행하는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1952 1 6일 개시된 제3기 작전에서 수도 사단의 지리산 포위 공격으로 남부군 직속 81사단, 92사단과 경상남도당의 57사단은 거의 전멸했다. 1 18일에 있었던 하동군 화개면 대성골 전투에서 유격대원들은 3개 연대의 포위 하에 박격포 공격과 공군기들의 폭격을 당하여 3백여 명이 사살되고 251명이 생포되었다. 이 숫자는 당시 대성골에 몰려 있던 유격대원의 절반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후 유격대는 떠돌이 부대로 전락했다.

 

3기 작전을 통하여 전개된 전투에서 남로당 경상남도당 위원장 남경우를 비롯하여 부위원장 허동욱, 조영래, 조직부장 강명석, 선전부장 안병하 등 14명의 경상남도당 수뇌부가 전멸했다. 1월 말까지 계속된 제3기 작전으로 수도 사단은 사살 1,867, 생포 1,055명의 전과를, 8사단은 사살 1,715, 생포 1,972명의 전과를, 서전사는 사살 102, 생포 615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7) 휴전 이후 빨치산 잔재 완전 소탕

 

경찰토벌대에 의한 잔존 빨치산의 토벌은 휴전 이후까지 계속되었꼬, 1953 9월 지리산 2병단장이자 빨치산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현상이 사살되었다. 1954 1월에는 전남 도당위원장인 방준표가 지리산에서 사살되었고 이 후 1955 4 1일부터 일반인의 지리산 입산이 허용되었다. 빨치산의 완전 소탕은 산청군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최후의 빨치산 이홍이가 사살되고 정순덕이 포로가 된 1963 11 12일이었다.

 


 

☞ 이승만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 관련 사진들










4.19 혁명 이후 진상조사를 통해 발굴된 유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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