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나는 역사이야기/역사 한눈에

대한민국 철도의 역사

산풀내음 2016. 9. 18. 06:06

대한민국 철도의 역사

 

1882년 조미통상수호조약을 맺은 이후 조선 사신들은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구경한 후 기차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후 미국인 제임스 모스가 조선에서 철도사업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뒤, 1895년에 이르러 일본군이 진남포와 평양 사이를 잇는 80km의 전쟁수행용 군용철도인 진평선을 만들었다. 진평선은 비록 꼬마열차가 달리는 협궤였지만 우리나라에 놓인 첫 철도였다.

 

1) 증기 엔진이 개막시킨 철도교통 시대

 

1765년 영국인 제임스 와트가 완성한 증기기관은 수동식 제조공장을 자동식으로 바꾸는 산업동력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기차와 자동차를 탄생시켜 육상교통의 혁신을 가져온 주역이었다. 1807 8 17뉴욕 밀러지는 증기기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증기 엔진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발명보다 훨씬 더 인류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또 증기 엔진은 지구상의 서로 다른 문명권 사람들을 한 데 묶을 것이다. 그리고 지구의 크기를 축소시킬 것이다.

 

영국 뉴캐슬에서 광산 엔지니어로 일하던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1781-1848) 1814년 이 증기 엔진으로 석탄을 더 빠르고 더 안전하게 그리고 더 싸게 운반할 수 있는 움직이는 기계(traveling machine)를 만들어 기관차(locomotive)라고 불렀다. 1822년 스티븐슨은 더햄 지역의 풍부한 석탄수송사업을 위한 철도회사를 설립하고 그가 만든 기관차 5대가 끄는 17량의 화차로 석탄을 수송하기 시작했다. 스티븐슨은 탄광용 기관차를 개발한 데 이어 기차 전용 철로를 고안해 1825년 스톡톤과 달링톤 사이에 부설하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화물과 승객 수송을 시작해 철도교통시대를 열었다.


 스티븐슨의 기관차 로코모션호, 로코모션 기관차는 6량의 석탄차와 450명의 승객을 실은 21량의 객차를 한시간만에 15Km를 주행하였다

 

1829년 그의 아들 로버트 스티븐슨과 함께 리버풀-멘체스트(Liverpool & Manchester) 철도에서 "로켓"이라는 기관차를 제작하였다. 이 로켓호는 1829년 리버풀-멘체스트 철도의 개업을 앞두고 행해진 기관차 경주에서 시속 46Km를 내어 우승을 함으로써 증기기관차의 우수한 성능과 실용성을 일반에게 인식시켰다.

 

미국의 철도를 개척한 인물은 미국 철도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존 스티븐스(John Stevens, 1749-1838)죠지 스티븐슨이 영국에서 실용적인 증기기관차를 제작하기 3년전인 1826년에 스티븐스는 뉴저지주의 호베큰(Hoboekn)에 있는 그의 집에 건설한 원형 트렉에서 증기 웨곤을 만들어 증기기관차의 실용성을 입증하였다


 

John Stevens(미국)의 증기 웨곤

 

이후 철도는 빠르게 세계로 퍼져나가 프랑스는 1832, 아일랜드는 1834, 벨기에는 1835, 캐나다는 1836, 이태리는 1837, 미국은 1839, 멕시코는 1850년에 각각 개통되었다.

 

 

2) 김기수의 일본 기차 시승기

 

1876 2월 일본과 조일수호조약(朝日守護條約)을 맺어 부산, 인천, 원산 등 4대 항구를 개방하고 그 해 4월 조약에 따라 우리나라는 일본에 첫 수신사를 파견했다. 이때 수신사로 참여한 예조 참의 김기수는 일본에서 각종 신식 문명을 견문하던 중 특히 기차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그가 일본을 다녀온 뒤 기록한 총 4권의일동기유’(日東記遊)에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일본에서 기차(汽車), 즉 화륜거(火輪車)를 타본 소감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요코하마에서 신바시까지 화륜거를 타기 위해 역누(驛樓)에서 잠시 쉬었다. 일행의 행장은 배로 에도(지금의 도쿄)의 항구까지 보내고 필요한 의복과 물건만을 기차에 싣기로 하였다. 차가 역누 앞에 기다린다고 하여 역누에서 장행랑(長行廊=복도)을 따라 수십 칸을 지났으나 차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기차가 어디에 있느냐고 안내인에게 물으니 이것이 기차라고 대답하였다. 장행랑이라고 한 것이 바로 기차였다.


앞의 1차는 화륜(火輪)이었는데, 앞에는 화륜이 끌고 뒤 객차에는 사람을 실었다. 객차는 3칸 크기 방()이고 반 칸은 마루모양의 승강구였다. 쇠갈고리(連結器)로써 객차가 객차에 연결되어 45차에서 10차까지 이르게 되니 그 길이가 3040칸에서 4050칸이나 되었으며, 마루를 통해 오르고 내리며 방에 앉게 되었더라. 밖에는 문목(文木)으로 장식하고 안에는 가죽과 털, 담요 등으로 꾸몄다. 방 양쪽에는 의자처럼 높고 가운데는 낮아 편편한데, 걸터앉아서 마주 대하니 한 방에 6인 혹은 8인이나 앉게 되었더라. 양쪽에는 모두 유리로 막았으며 장식이 찬란해 눈이 부셨다.


차마다 모두 바퀴가 달려 있어 앞에서 화륜이 구르면 뒤의 여러 객차의 바퀴들이 따라서 모두 구르게 되니 우레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같이 날뛰었다. 한 시간에 300400리를 달린다고 하였는데 차체(車體)는 안온해 조금도 요동하지 않으며, 다만 좌우에 산천초목, 가옥, 사람이 보이기는 하나 앞에 번쩍 뒤에 번쩍하므로 도저히 잡아 보기가 어려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신바시까지 도착했으니 그 거리가 95리나 된다더라.

 

그 해 6월 일본에서 귀국한 김기수가 국왕에게 일본에게서 본 것들을 이야기하자 고종은 특히 기차, 전신, 농기구 등 서양의 과학이기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이어서 조미수호조약(朝美修好條約) 체결 때문에 1880 5월부터 8월까지 일본에 다녀온 수신사 김홍집도 전신, 조세, 관세 등과 더불어 철도가 국가 부흥에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하여 188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서서히 철도의 필요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김기수와 일동기유

 

 

3) 철도 부설의 필요성 인식

 

우리나라에서 철도가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은 열강들이 철도부설권을 요구하기 시작한 1882년부터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정치고문이던 독일인 묄렌도르프(18481901)는 고종에게 국고가 빈약하니 철도 부설을 연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건의했다.

 

1882년 미국과 조미통상수호조약을 맺은 이후 두 나라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게 되었다. 조미통상조약에 따라 1883년 초 조선 미국공사로 푸트가 부임하자 이에 대한 답례로 고종은 젊은 개화파 정치가인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보빙사로 임명해 홍영식 등을 미국으로 파견했다. 아더 미국 대통령을 예방한 뒤 때마침 보스턴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구경하고 기차를 타본 이들은 귀국 후 기차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조미통상사절단

 

1887 6월 주미조선공사(駐美朝鮮公使)로 임명된 박정양을 수행한 이하영이 미국체류 중 기차를 타보고 그 편리함과 신기함에 감탄한 나머지 귀국할 때 정교하게 만든 기차와 철도 모형을 가지고 와 고종에게 보여주었고, 이를 계기로 철도부설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철도 바람이 불었으나 10여 년 가까이 자금과 기술부족으로 철도부설을 미루고 있는 가운데, 1892 5월 미국인 제임스 모스는 조선에서 철도사업을 하기 위해 미국에 있던 주미참찬관 이완용과 서기관 이하영을 설득했다. 이에 이완용과 이하영은 귀국 즉시 고종에게 철도부설의 절박함을 주장하고 고종을 설득한 끝에 모스를 고문으로 초청할 것을 허가 받기에 이르렀고, 이듬해인 1893년 모스가 조선으로 들어왔다. 모스는 철도부설권을 쉽게 따기 위해 오히려 조선정부에 왕복여비 등 손해 보상비로 은() 1만 원을 청구하는 비열한 짓을 해 한동안 말썽을 일으켰다.

 

 

4) 조선 철도 부설권 탈취 위한 일본의 흉계

 

한편 1892 8, 일본정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인 철도기사 가와노 텐즈이 일행이 부산주재 총영사 무로다 요시부미의 도움을 받아 사냥꾼으로 변장해 서울∼부산간 철도 선로를 몰래 답사한 후 이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와 도면을 작성해 일본 정부에 제출했다. 그 뒤 1894 7월 일본 외상 무츠 무네미츠는 다케우치 츠나를 우리나라에 파견해 서울∼인천간과 서울∼부산간 철도부설을 본격적으로 계획했다. 청일전쟁을 치르기 위한 군용으로 이 두 철도는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사냥꾼으로 변장한 경부선 일본 측량대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이 일본의 우세로 돌아서자 일본은 당초의 계획을 바꾸어 일단 전쟁이 끝난 뒤 경인철도를 부설하기로 했다. 그 대신 일본군은 1895 2월 진남포와 평양 사이에 80km의 전쟁수행용 군용철도를 만들었다. 일본식 협궤 철도였다. 일본군의 우세로 일단 주전선이 북상해 평양까지 이르자 막대한 자금과 오랜 시간이 걸리는 부산-평양간 철도 부설 대신 선박으로 군대와 군수품을 싣고 서해로 올라와 진남포에 내린 뒤 평양으로 운송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을 모두 절약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러한 약식 군용철도는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자 크게 쓸모가 없어져 전쟁 후 철거되고 말았다. 비록 협궤에 꼬마열차였지만 진평선은 우리나라에 놓인 첫 철도였다.


진평선 협괘열차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철도라 할 수 있는 경인철도 부설권은 1896년 미국인 모스가 고종 황제로부터 받게 됐다. 모스는 인천의 미국인 거상 타운센드와 함께 한국개발공사를 설립하고, 1897 3 22일 인천 우각리 쇠뿔고개에서 인부 350명을 모아놓고 역사적인 기공식을 가졌다.


 

1897 3 22일 인천 우각리에서 열린 경인철도 기공식 광경

 

하지만 모오스는 당시 자금난에 봉착하게 되었고 부설권을 놓친 일본은 집요하게 매수를 시도하였다. 결국 모오스는 1898 12, 170만원을 받고 부설권을 일본인들의 경인철도인수조합으로 넘기고 말았다. 일본은 1899 4 23일 인천역에서 제2차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속도를 높여서 9 18일에 경인철도 가영업을 시작했다.

 

 

5) 열강의 철도부설권 쟁탈전

 

조선에 철도를 부설하는 문제는 이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던 열강들에게 정치, 경제, 군사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일본은 한반도를 중국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삼아 만주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부설하려 했고, 러시아는 한반도 남단까지 시베리아 철도를 연결해 부산에 부동항을 확보하려 했다. 또 청나라는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철도부설권을 원했고, 영국 역시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서의 철도부설권을 얻으려 했다.

 

당시 명성왕후는 박영효 등의 친일내각을 누르고 이범진, 이완용 등을 중심으로 한 친러 내각을 조직해 득세하기 시작했다. 정세가 위급해진 일본은 민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꾸며 1895년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왕후 시해 사건으로 열강들의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은 차관을 미끼 삼아 이를 모면하는 한편 친러파를 몰아내고 철도, 전신, 광산 등의 이권을 빼앗고자 무력을 앞세워 우리정부의 조직을 일본식으로 개혁하는 을미개혁을 일으켰다.


 

일본군이 1905년 철도부설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한국인을 총살하고 있는 장면

 

 

6) 철도부설권 사수 위한 우리 민족의 저항

 

조선정부는 1900년에 경의선과 경원선을 직접 건설하기 위해 서북철도국을 황실직속으로 세웠다. 정부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 첫 민족철도회사 설립자인 박기종(1839-1907)은 프랑스가 차지했다가 되돌려준 경의선과 삼마선을 부설하기로 계획했으나 기술과 자금의 부족 및 일본의 방해로 인해 실현하지 못했다


 

박기종

 

 

7) 철도의 건설

 

. 경인선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로 서울특별시 구로역에서 인천광역시 인천역 간의 총 연장 27.0㎞의 복복선철도이다. 1896(고종 33) 미국인 모스(Morse, J. R.)에게 그 부설권이 특허되어 이듬해 3 29일 기공되었고, 1899 9 18일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京仁鐵道合資會社)가 완공시켜 개통되었다.


 

경인선 철도 개통식, 노량진역


1899년 당시 인천역

1899 9월 첫 기적소리

 

일본은 인천과 노량진간의 개통에 이어 노량진과 서울역 공사를 서둘러 1900 7 8일에 전구간을 개통시켰고, 11 12일에 서대문에서 개업식을 가졌다. 경인선은 1965 9 18일 복선에 이어 1974 8 15일 전철화됐다.


 

1900년 한강철교가 준공되면서 경인선 철도가 완전 개통되게 되었다.

 

 

. 경부선

 

1901 8 20일에 서울 영등포에서, 같은 해 9 21일에 부산 초량에서 일본 자본의 회사인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의해 기공되어 4년 후인 1904 12 27일 완공되었다. 1905 1 1일을 기하여 전선(全線)의 영업이 개시되었다. 그 해 5 25일에 서울 남대문 정거장(지금의 서울역) 광장에서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길이는 441.7㎞이고 우리나라의 양대 도시인 서울특별시와 부산광역시를 연결하고 대전광역시, 대구광역시를 경유하는 한국 철도의 중추 간선노선이다. 장항선·충북선·호남선 등과 접속되어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1901년 경부선 부산 기공식




경부선 개통. 축하 아치를 세우고 첫 출발을 시도


부산 초량에서 개최한 경부선 개통 축하 기념식

 

 

. 경의선

 

경의선은 1902 기공되었으며, 1896 프랑스 피브릴(Fives Lile)사가 처음으로 부설권을 얻었으나 자금 조달이 어려워 부설권을 상실하였다. 1899 대한철도회사가 다시 특허를 얻었다가 또 다시 실패하자 1900 정부기관인 내장원(內藏院)에 서부철도국을 두고 서울-개성 간 선로 측량을 시작하였다. 그 뒤 1904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서울-신의주 간 군용철도를 부설하기 위하여 임시군용철도감부를 설치하였다. 일본은 이를 대륙침략노선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공사를 서둘렀다. 1904 3월 용산-개성 구간의 노반공사에 착수, 1905년 평양-신의주 구간이 완공되어 용산-신의주 구간에 직통운전이 시작되었으며, 1906년 청천강·대동강 철교가 준공되면서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일본군 공병대가 부설하는 경의선 철도


일본에 의한 경의선 착공

 

1908 신의주 - 부산 사이(경부철도)에 한국 최초의 급행열차인 융희호(隆熙號)가 운행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11 압록강 철교가 완공되어 중국만주를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국제 철도 노선의 일부가 되기도 하였다.

1943년에는 평양-신의주 구간이 복선화되었다. 광복 후 남북분단이 되었지만 열차는 계속 운행해 오다가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문산-개성 운행이 중단되면서 남북간 철도는 끊기게 된다.



1905년 경의선 초기 열차

당시 평양역

 

 

. 서울역

 

1899 9월 18 개통한 경인선은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노선이었지만, 개통 당시에는 한강 바로 앞의 노량진에서 끊겨 사실상 서울을 연결해 주지 못하였다. 1900 7월 5 한강철교의 개통으로 한성부에 드디어 철도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서울역은 이때 10평 크기의 목조 바라크 건물을 염천교 아래 논 가운데에 가설하여 문을 열었다. 당시 용산역이 더 규모가 컸으므로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05 경부선이 개통하였고, 1906에는 경의선이 개통하는 등 교통이 개선되었으나, 그 규모는 작았다.


 

간이역사

 

경성부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경성의 관문이 될 중심역을 만들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경부선·경원선·용산선이 만나는 용산은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된데다, 도심에서 떨어져 있어 신 역사 건설에는 부적합했다. 따라서 도심과 가까운 기존의 남대문정거장을 경성역으로 개량하기로 하여 1922 역사 건설이 시작되게 된다. 그 뒤 1923 1월 1 경성역으로 역명을 바꾸고 본격적인 경성부의 관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도쿄 에 이은 동양 제2의 규모로 지어진 역사는 1925 완공되었고, 이후 만주 방면의 국제 열차를 취급하는 등 한반도의 철도 교통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경성역 공사

 


 

. 전라선

 

1913 1 전북철도주식회사가 철도 부설면허를 받아 1914 5에 토목공사를 착수하여 같은 해 10에 준공하고, 1914 11월 17부터 이리-전주 구간이 여객 운송을 개시하였다. 또한 화물 등 일반 운송업무는 같은 해 12월 1부터 시작하였다. 1927 10 조선총독부에서 90만원에 매수하여 경전북부선이라고 개칭하고, 표준궤로 개궤하였다. 1931 10월 1에는 전주-남원, 1933 10월 5에는 남원-곡성, 1936 12월 16에는 곡성-순천 구간이 개통되었다. 순천-여수항 구간은 이미 개통되어 있던 남조선철도 소속의 광려선(송정리-보성-순천-여수항)을 조선총독부에서 1936 9에 매수해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광려선의 인수와 함께 익산-여수항 구간을 전라선으로 개칭하였으며, 1937 3에 와서야 전라선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1936개운역 (현재는 이설됨)

 

 

. 경춘선

 

경춘선은 1939 7월 25 ‘경춘철도(京春鐵道)’에 의해서 사설 철도로 개통되었으며 당시 24개역으로 운행을 개시하였으며 이후 1946 5월 17에 경춘철도주식회사 국유화로 국가에 편입하였고 이후 코레일이 운영권을 갖게 되었으며 간선철도로 편입되었다. 이후 2010 12월 21 상봉-춘천 복선 전철이 개통되면서 경춘선은 수도권 전철 운영 구간에 편입되었고 이후 도권 전철ITX-청춘으로만 운행하게 되었다.

 

 

. 중앙선

 

1917 9월 20, 조선철도주식회사(朝鮮鐵道株式會社) 소속의 경동선의 일부로써 영천역 ~ 서악역 간 20.6 km 개통을 시작으로, 1939 4월 1 청량리역 ~ 양평역 52.5km구간을 개통하고 이 구간의 노선명을 경경북부선(京慶北部線)으로 개명하였다.

1940 3월 1에는 경경남부선 경북안동역(안동역) ~ 우보역 48.9km구간 개통하였고, 1941 7월 1 경경북부선 원주역 ~ 제천역 46.8km구간과 경경남부선 영주역 ~ 안동역 38.7km구간 개통하여, 경경북부선과 경경남부선을 통합하여 경경선(京慶線)으로 개명하였다. 1942 4월 1제천역 ~ 영주역 62.3km구간의 개통으로 경경선(京慶線)이 완전히 개통되었다.

1942 6월 1에 동경성역이 청량리역으로 개명되어 본선의 구간은 청량리역~경주역으로 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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