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나는 역사이야기/역사 한눈에

빌리 브란트, Willy Brandt

산풀내음 2016. 10. 13. 05:19

빌리 브란트, Willy Brandt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 12월 18 ~ 1992 10월 8)1969부터 1974까지 독일연방공화국 (당시 서독) 의 제4총리를 맡았으며 1961부터 1988까지 독일 사회민주당(이후 사민당)을 이끈 정치인이다. 그는 1971, 동독공산주의 국가들과의 동방 정책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빌리 브란트는 본명이 아닌 망명 중 생긴 이름으로, 본래 이름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Herbert Ernst Karl Frahm) 이었다.

 

 

빌리 브란트는 1913 12월 8, 독일 제국뤼벡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9 '사회주의 청년단'에 입단하고, 1930에는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는 보다 좌익 성향의 사회주의 노동자당에 입당하기 위해 곧 사민당을 탈당하였다. 1933에 그는 나치당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선박업에 종사하는 지인들을 이용, 노르웨이로 망명하였다. 1938나치 독일은 그의 국적을 박탈하였고, 그는 노르웨이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1940 독일의 압력 하의 노르웨이는 그를 체포하였으나 곧 풀려났다. 풀려난 후 그는 바로 스웨덴으로 도피하였다. 8월에 그는 스톡홀름의 노르웨이 대사관으로부터 여권을 받아 정식으로 노르웨이 국적자가 되었다.

 

나치 정권시절 노르웨이스웨덴에서 히틀러 정권에 항거하는 정치활동을 했다. 1949 9월에 귀환하였으며, 1961부터 1969까지 독일연방공화국 서베를린의 시장을 역임했다. 이 때 연방(미국, 영국, 프랑스 등)과 소련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면서 서독과 동독의 관계를 해소, 결합시키는 데 애썼다. 당시 라이벌(?)이었던 당시 총리 콘라드 아데나워는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전쟁이 터질 위험이 있다고 본 것. 브란트는 먼저 서독과 동독의 위치를 동등하게 끌어올린 후 미국-소련으로부터 독립시켜 통일시키려는 입장을 지향했다.

 

빌리 브란트는 1963년 사민당의 당수로 선출되어 여러 대중적인 정책을 내세워서 당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1965 총선에서도 역시 기민/기사련에 뒤지는 2당이었으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내각의 인기가 떨어지고 자유민주당(독일)과도 갈라서면서 결국 1966 11, 1당 기민련 쿠르트 키징거 총재와 제2당 사민당 빌리 브란트 총재의 협상에 의해서 독일 역사상 최초의 대연정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대연정은 1969년 기존의 공산권에 대한 강경정책을 고수하는 기민련과 공산권과의 적극적인 화해/협력을 주장하는 동방정책을 내건 사민당의 충돌로 무너진다.

 

West Berlin 시장인 브란트가 베를린 장벽 방문, 1962. 2. 23.

Willy Brandt with John F. Kennedy in front of Rathaus Schöneberg in Berlin, 1963

독일에서도 케네디의 인기는

 

1969 9, 사민당은 불과 13석 차이로 제2당이 되었으나 독일 자민당과 연정하여, 빌리 브란트는 독일의 첫 사민당 출신 수상으로 취임했다. 그는 아데나워 이래로 독일 정부가 고수하고 있던 "동독과 수교를 맺고 있는 국가와는 상대 안 한다"는 기존의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적극적으로 공산권과의 교류협력을 추진하는 '동방 정책'을 표방하였다. 이로 인해 소련 및 동구권 공산권 국가와의 긴장관계를 완화시키고, 커다란 외교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1970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추념비에서 참회의 무릎을 꿇은 사건으로 유명하다. 일명 브란트의 무릎꿇기(Brandt Kniefall)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독일통일의 기틀을 다진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독일통일은 1990기독교민주연합 헬무트 총리의 재임 시절에 이루어졌지만, 빌리 브란트가 시작하고 헬무트 슈미트가 계승한 동방정책과 동독과의 끊임없는 교류 추진이 없었다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1972 승부수를 건 의회 해산 총선거에서 사민당이 1당이 되는 역대적인 기록을 올렸다. 그러나 얼마 못간 1974 자신의 비서 귄터 기욤과 그의 부인 크리스텔 기욤이 동독의 간첩이었던 으로 드러나 많은 독일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조사 결과 귄터 기욤이 동독에 넘긴 자료들은 국가 안보에 위해가 될만한 정보는 없어서 브란트의 지위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는 않았지만 연방범죄청이 브란트의 음주 행각, 섹스 스캔들을 밝혀낸 것과 브란트의 우울증이 겹치면서 브란트는 견디지 못하고 5년 만에 수상을 사임하고 만다.


 

Former German Chancellor Willy Brandt (right) is pictured here with his wife Rut and then Soviet leader Leonid Breshnev in 1972 in Bonn. During the 1970s, his Social Democratic Party began the Ostpolitik policies of rapprochement with the East, leading to a normalization of relations. The party has adopted a similar approach in its dealings with Vladimir Putin, the autocratic current Russian president.


Willy Brandt giving a speech in Wismar, campaigning for the only free parliamentary election in East Germany (March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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