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충북

추억을 따라 간, 속리산 법주사

산풀내음 2018. 6. 5. 20:58

대학 2학년 겨울방학이었던1987년 1월, 나는 과 선후배 몇명과 함께 속리산 법주사로 향했다. 매우 불안하고 암울했던 시기였다. 군화발로 권력을 움켜 쥔 전두환의 제 5공화국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시기였고, 민주화의 열망 속에서 학생들은 도서관이 아니라 거리로 나가 몸을 사리지 않고 울부짖었는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냥 방관자일 뿐 이었다. 무엇이 옳은 것이며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지만, 당장 학비와 집안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과 돌과 체류탄이 오고가는 물리적 폭력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로 그냥 방황만 하고 있었다.

처음 찾은 법주사에서의 참선 수행과 새벽/사시/저녁 예불 그리고 이어지는 1080배 철야 기도는 불확실성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나의 몸부림이었다. 육체적 피곤함이 더해질수록 마음은 평화로워졌다. 다시 밝아온 새벽에 우리는 도량석(道場釋)과 함께 새벽 예불을 마치고 눈 옷을 새롭게 입은 속리산 천왕봉으로 향했다. 밤새 살포시 내려 앉은 눈길에 처음으로 우리의 자취를 남기며 오르는 처녀 산행은 마치 우리가 오늘 새롭게 태어나 자신있게 세상을 향해 첫 발걸음을 내딛는 듯했다. 천왕봉에서의 큰 외침에 근심 걱정을 모두 날려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신선대의 작은 주막에 들려 곡차 한 잔을 기울이며 내일의 희망을 이야기했다. 희망을 가슴에 품고 내려오는 길, 지난 밤 내내 우리와 함께 해 주셨던 지도 스님께서 어디를 잠깐 들리자고 하셨다. 극락에서나 맛볼 수 있는 물 맛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산행로가 아닌 정말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을 한참동안 내려오다가 들린 작은 암자(사실 나중에 여쭤보고 안 것이지만 지도 스님께서 행자 생활을 법주사에서 하셔서 속리산 길은 부처님 손안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내가 태어나 여태까지 느껴본 최고의 물이 그곳에 있었다. 어쩌면 사바의 세계에서는 도저히 느껴볼 수 없는 그런 맛은 살아오는 내내 가슴 한 편에 남아있었다. 이후 다시 그곳을 찾아가고 싶어 당시 같이 동행했었던 분들에게 암자 이름을 물어 보았지만 아무도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고 당시의 스님도 연락이 닿지 않아 확인할 수 있는 길도 없었다.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하고 시간은 흘러 갔다.

정확한 시간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10년이 훌쩍 지난 언제쯤, 아내와 아이 둘과 함께 두번째로 법주사를 찾았다. 법주사 대웅전에서 뵈었던 부처의 따스한 미소를 다시 느끼고 싶어서 그리고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 때의 물 맛을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당시 법주사 대웅전은 새롭게 정비 중이어서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고 법주사의 암자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그 수가 많아 일일이 찾아 확인해 볼 수가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고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렇게 잊은 듯 살아 오다가, 문득 다시 기억 저편에서 떠오른 법주사를 다녀왔다. 대학 때와는 다르게 산행을 먼저하고 법주사를 들려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사찰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것이 아니라 인근에 있는 사내리 캠핑장에서 아내와 야영을 하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한 동안 가슴 속에 남아 있었던 그때의 그 물맛은 잊혀진지 오래였다. 산행도 문장대에서 문수봉, 신선대, 비로봉을 거쳐 천왕봉까지 둘러보고 법주사로 다시 내려오는 코스를 선택하였다. 예상시간은 8시간 30분에서 10시간 정도이었기에 새벽 4시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5시에 서울에서 출발해 속리산에 도착한 시간은 7시. 사내리 야영장에 차를 주차하고 법주사를 지나 문장대로 향했다. 가슴 속 깊이 스며드는 속리산의 맑은 산내음을 즐기며 세심정을 지나 문장대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스님 한분이 암자 앞 빗질에 여념이 없으시다. 잠깐 고개를 들었을 때 지나가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합장으로 인사들 드리니 젊은 스님께서도 합장으로 답을 하신다. 스님을 지나쳐 갈려고 할 때, 스님께서 "잠깐만요, 부처가 감탄할만한 경치를 보고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하신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일면식도 없는 스님께서 잠깐 암자에 들려 좋은 풍경을 보고 가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차마 스님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아내와 나는 스님을 따라 암자로 들어갔다. 


법주사 일주문

법주사를 지나면 곧 작은 호수가 나온다.


'사실 하안거(夏安居) 기간 중이라 스님들께서 수행 중이시니 절에서 말씀하는 것만 조금 조심해 달라'고 당부하신다. 하안거든 동안거든 안거 기간 중에는 일반 신도들의 출입이 극히 제한되는 것이 절간의 법도라 더더욱 스님의 호의가 의아했다. 스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극락보전에 들러 아미타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나한전으로 올라갔다. 나한전 앞에서 펼쳐져 있는 소나무 숲의 풍광은 마치 신선도의 그림을 옮겨 놓은 듯했다. 처음보는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아니면 전생에서 이미 봤던 것처럼 익숙한 느낌이었다.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내려오니 스님께서 두 손에 차를 들고 서 계셨다. 이렇게 오셨는데 자신께서 직접 담근 차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신다. 우리가 스님께 드린 것은 합장 인사 밖에 없는데.. 너무나도 황송하였다.

내려오면서 스님께서는 복천암은 신라 성덕왕 때 세워진 절로 한때는 법주사를 말사로 둘 정도로 번창하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법주사의 말사라고 하시면서, 본래 이곳은 세조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으로 이곳에 오면 반드시 약수물을 먹어보고 가셔야 한다고 하신다. 스님께서 안내해 주는 곳으로 갔다. 조금 전 아무 생각없이 그냥 지나쳤던 곳이었다. 순간 머리를 한대 맞은 듯, 멍해졌다. 그곳은 22년 전 '천상의 물 맛'을 느꼈든 바로 그곳이었다. 그토록 찾고자 했을 때는 찾지 못했던 곳을 우연한 인연에 이끌려 그곳을 비로소 찾게 된 것이었다. 아쉽게도 그때의 청량함은 느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복천암 물의 청량함은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었다.

스님께 복천암 물과의 인연을 말씀드리니 스님께서도 나를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암자로 모시고 싶었다고 하신다. 이것이 부처가 말하는 인연인가? 


복천암 가장 위쪽에 위치한 나한전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문장대로 향했다. 계곡 물을 따라 나 있는 길은 피곤함을 느낄 틈을 주지 않는다. 냉천골을 지나 문장대 직전 500m 정도 잠깐 급경사가 나오지만 그냥 두어번 쉬어간다라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잠깐의 힘듬 뒤에 오는 문장대의 절경은 그 힘듬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다고 할 수 있다.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은 적었다. 하지만 단체로 온 듯한 외국인들의 모습이 색다르게 다가왔고, 적은 관광객 덕에 좀더 여유롭게 문장대를 즐길 수 있어서 너무나도 좋은 시간이었다.


문장대에서 속리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천왕봉으로 발길을 돌렸다. 문수봉을 지나 신선대 직전에 있는 휴게소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도 즐겼다. 그닥 어려운 코스는 아니었지만 오르 내림의 반복에서 오는 약간의 지루함은 있는 코스라고 생각이 든다. 옛모습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도착한 신선대 휴게소는 예전의 모습은 아니었다. 어렴풋한 신선대 휴게소의 모습은 사람이 기거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듯한 허름한 집에 나그네가 쉬어 갈 듯한 테이블 두어개가 있는 그런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옛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한약재의 냄새가 잔잔하게 베어 있는 달짝지근한 커피와 함께 준비한 계란 등으로 끼니를 간단하게 때우고 다시 길을 나섰다.

한참을 가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사전에 조사한 바와는 달리 너무나도 가파른 길을 계속 내려가는 것이었다. 순간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지나니 '경업대'란 표지가 나왔다. 비로봉을 거쳐 천왕봉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신선대에서 세심정을 거쳐 법주사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아쉬움에 다시 올라갈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좀더 여유를 가지면서 산행을 즐기기로 마음을 먹으니 속리산의 다른 풍광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경업대 바위에 누워 하늘도 바라보고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니 여행의 또다른 매력을 알게 되는 기회였다.

가파른 길을 한참을 내려오니 어느새 법주사였다. 법주사는 진흥왕 14년(553년)에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혜공왕 12)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게다가 법주사는 국보 3점과 보물 13점 등 문화재를 40여 개나 보유하고 있는 천오백년 고찰이다.

금강문을 들어서니 사찰이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미륵신앙의 본거지임을 상징하는 33m 높이의 금동미륵대불이 모셔져 있다. 법주사의 금동미륵대불은 법주사에 있는 다른 사적과는 달리 역사가 오래된 문화재는 아니다. 이곳에는 통일신라 때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진표율사가 조성한 금동미륵대불이 있었는데,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해가면서 없어졌다. 일제강점기 조각가 김복진이 시멘트로 거대불상을 조성하여 1986년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990년대에 낡은 불상을 해체하고 그 형태를 복사해서 청동불상을 조성하였으며, 2002년에 개금불사를 시작하면서 원래의 금동미륵불상의 모습을 다시 찾게 되었다. 불상은 석실이 있는 2층 기단위에 세워져 있고, 원형으로 된 석실내에는 미륵반가상을 모신 불전이 있다.


나는 사천왕문을 지나 팔상전으로 갔다. 세월이 묻어 있는 단청의 소박함에서 부처의 자비를 느끼는 듯하다. 흔히들 국내 유일한 목탑으로 알고 있지만, 팔상전은 단순한 탑이 아니라 불사리 봉안처로서의 탑의 성격과 예배 장소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갖춘 ‘탑전(塔殿)’ 형식의 건축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5층 누각형식의 목조탑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왕 때 2년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탑을 완성하였는데 그 높이가 총 225척에 달했다고 한다. 목탑은 삼국시대 뿐 아니라 고려시대도 세워졌음이 만복사지의 탑지에 의해 밝혀진 바 있고, 조선시대까지도 전해져왔음을 현존하는 유적에서 확인되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법주사 팔상전인 것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553년 신라 진흥왕 당시 의신(義信)스님에 의해 창건, 776년 신라 혜공왕 2년 병진(秉眞)스님에 의해 중창 되었다. 1597년 임진왜란 병화에 불타 없어진 것을 1605년(조선 선조 38년)부터 1626년에 걸쳐 유정(惟政)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원래 양식과 거의 동일하게 중건하였다. 지난 1968년 전면 해체수리 할 때, 전체 건축물을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심주(心柱) 밑에서 부처님 사리가 들어 있는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법주사 팔상전이 불사리 봉안처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불교신문, 2006. 8. 12. '법주사 팔상전')


사실 내가 가장 가 보고 싶었던 곳은 법주사의 대웅보전이었다. 22년 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던 곳이며 그때 느꼈던 부처님의 따스한 눈길을 다시 한번더 뵙고 싶어서였다. 그 때 그 자리에서 기도를 드렸다. 그때의 절박함은 아니었지만 부처의 따스한 눈빛은 변함이 없다. 

법주사 대웅보전은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처음 건립하여 혜공왕 12년(776) 진표율사가 고쳐지었으나 임진왜란시 불타 버린후 인조 2년(1624)에 벽암대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부여의 무량사 극락전, 구례의 화엄사 각황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불전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높다란 불단 위에는 중앙에는 본존불인 비로자나불, 본존불의 왼쪽(향우측)에는 노사나불, 본존불의 오른쪽(향좌측)에는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세 분은 삼신불(三身佛)로 중앙의 불상은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다는 진여의 몸인 법신 비로자나불상이고, 왼쪽의 불상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한 과보로 나타날 보신의 노사나불상이며, 오른쪽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화신으로 나타난 석가모니불상이다. 부처님은 원래 한 분이지만 우리 중생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세 몸(三身)으로 모셔 놓은 것이다.



기도를 마치고 대웅보전 앞 300살이 넘은 보리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쉬원한 바람에 촉촉히 흘러내린 땀과 함께 근심도 날려보낸다. 관광객 들은 대웅보전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한켠에서는 템플 스테이에 참여한 듯한 2-30여명의 아이들이 사찰 해설자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다.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를 느껴서인지 바라보는 모든 모습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법주사에 대하여 자료를 찾다가 법주사 바로 옆에 위치한 수정암으로 가는 길이자 금강문 왼편 사리각 옆에 있는 거대한 바위, '추래암'에 마애여래의좌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미 두번이나 다녀간 법주사이었지만 법주사 한 모퉁이에 마애불이 계시다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암벽에 새긴 활짝 핀 연꽃 위에 앉은 부처님은 보기 드문 의자에 앉아 있는 의상(倚像)이었다. 마에불의 둥글고 넓은 얼굴, 낮은 콧등과 납작한 코 모양은 부처라기 보다는 마음 착한 동네 어른과 같은 친숙함이 있다. 여기에도 간절함이 가득한 중생들이 지성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다. 중생들의 모든 간절함이 다 원만하게 이루어지길 바라며 뉘엿뉘엿 지는 해와 함께 캠프장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찾은 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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