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11일

미국에 의해 아옌데 칠레 대통령 피살

산풀내음 2016. 8. 18. 21:31

19739 11,

미국에 의해 아옌데 칠레 대통령 피살

 


 

1973 9 11일 칠례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육군 참모총장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Jose Ramon Pinochet Uarte, 1915-2006)가 주도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고,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Gossens, 1908 7월 26 ~ 1973 9월 11) 칠레 대통령이 대통령궁을 포위한 군부대의 공격에 저항하다 피살되었다. 그의 나이 65세였다.

 

아옌데는 1908년 칠레 발파라이소에서 다소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칠레대학교 의과대학 시절 사회주의에 빠졌고 1933년 칠레의 사회주의 정당인 칠레 사회당의 창당에 참여했다. 1937년 칠레 사회당 후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치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52년부터 1964년까지 세 번이나 대선에 출마했지만 공산당과 사회당의 분열, 그리고 보수진영의 격렬한 방해공작으로 고배를 마셨고, 마침내 1970년에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연합전선인 인민연합의 후보로 나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11 3일 정식 취임했다.


Chileans marching in support of Allende

 


당시 칠레는 미국과 칠레 내부 기득권층에 의한 경제적 수탈이 심한 실정이었다. 심지어는 다국적 기업들이 칠레의 탄광이나 구리 광산 등을 독점하고 있었다. 아옌데는 취임 이후 이런 칠레의 왜곡된 경제구조를 개혁했다. 다국적 기업들이 소유한 탄광, 구리광산들과 대형 은행들을 국유화했고, 영양부족으로 유아사망률이 심했던 칠레의 상황을 고려해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우유를 배급하는 정책도 추진했다. 다른 한편으로 과도한 대토지 소유를 규제하고자 사유지의 4분의 1 내지 5분의 1을 국유화하는 토지개혁도 추진했다.

 

이러한 개혁에 대해 기득권층과 결탁된 미국은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칠레의 주요 수출품인 구리의 수입을 줄임과 동시에 비축한 구리를 대량 방출해 세계 구리 가격을 폭락시켰다. 또한 칠레에 대한 대외차관을 막았으며 생필품, 의료품의 수출을 통제했다. 또한 미국 정부는 8백만 달러의 자금을 들여 9 11일 군부 쿠데타를 지원하기도 했다.

 

아옌데 임기의 첫 1년 동안 경제 장관 페드로 부스코빅의 재정 확대 정책의 성과로 단기적으로 호조를 보였다. 산업 성장은 12%, GDP 8.6%로 성장했으며, 인플레이션 34.9%에서 22.1%로 크게 줄었고 실업률도 3.8%로 떨어졌다.

 

하지만 미국의 노골적인 방해의 결과 1972에 칠레 에스쿠도화의 인플레이션율은 140%에 이르렀다. 19711973 사이에 평균 실질 GDP 1년마다 -5.6%씩 수축되었고, 정부 예산 적자는 치솟고 외환보유고는 떨어졌다. 물가는 상승하는데 정부는 가격 통제를 강제하면서 상점에서 생필품은 사라지고 지하 시장이 늘어났다.

 

그런 와중에 칠레의 육-- 3군사령관은 정국혼란의 책임을 지고 사임할 것을 종용했지만 아옌데 대통령은 이런 압력을 당연히 거부하고 대신 재신임 여부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국민투표가 실행되기 하루 전날인 9 11일 미국과 피노체트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렸다.

 

9 11일 쿠데타 세력이 칠레 대통령 집무실인 모네다 궁을 공군 비행기로 폭격하기 직전 피노체트는 아옌데에게 투항하고 항복할 것을 마지막으로 권유했다. 투항한다면 외국으로의 망명을 보장하고 생명을 위협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 제안 또한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아옌데가 망명을 하려고 비행기를 탔을 때 그 비행기를 격추시키는 것이 쿠데타 세력의 계획이었다고 한다.

 

모네다 궁은 대통령 집무실이자 칠레 독립선언서가 소장돼 있는 유서 깊은 장소였다. 이 모네다 궁에서 아옌데는 쿠데타 세력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유일한 국영방송인 마가야네스 라디오(Radio Magallanes)를 통해 피노체트의 항복 권유를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그 유명한고별 연설을 한다.

 

나의 벗들이여, 분명 지금이 여러분에게 연설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겁니다. 공군이 라디오 마가야네스의 안테나를 폭격했습니다.

 

제가 느끼는 감정은 비통함이라기보다는 실망감입니다. 충성서역을 어긴 자들은 도덕적인 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칠레의 군 사령관들, 해군 사령관을 자처하고 나선 메리노 제독(Jose Toribio Merino Castro. 1915-1996), 겨우 어제 정부에 충성과 헌신을 맹세하고서는 준 경찰조직 카라비네로스(Carabineros)의 사령관으로 스스로를 임명한 비열한 멘도사(César Leonidas Mendoza Durán. 1918-1996. 군 장성 출신으로, 1973년 쿠데타 때부터 1990년 물러날 때까지 군사조직에 가까운 준 경찰조직 카라비네로스를 이끌었던 인물) 같은 자들 말입니다. 이 모든 작태에 맞서 저는 노동자들에게 오직 이렇게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나는 결코 사임하지 않는다고!

 

이 역사적 갈림길에서 저는 민중의 충성에 제 생명으로 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께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수천, 수만 칠레인 들의 소중한 양심에 심어 놓은 씨앗들은 일격에 베어 쓰러뜨릴 수 있는 게 아님을 확신한다고.

 

저들은 힘을 가졌습니다. 저들은 우릴 종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범죄 행위로도, 무력으로도 사회의 진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만드는 건 민중입니다.

 

이 나라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지켜왔던 그 충성, 여러분이 이 사람, 다만 정의를 향한 크나큰 열망의 통역자였고 헌법의 존중을 맹세했으며 이것을 지킨 한 사람에게 보여준 그 신뢰에 감사 드리고자 합니다.

 

이 마지막 순간에,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연설을 통해 저는 여러분이 이 교훈을 얻길 바랍니다.

외국 자본과 제국주의는 반동 세력들과 손잡고 무장 군인들이 전통을 깨뜨리게끔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슈나이더 장군(René Schneider Chereau. 1913-1970. 아옌데가 집권할 무렵 칠레 군 합참의장을 지낸 장군. 군부와 정치가 서로 간섭하지 못하도록 분리하는 ‘슈나이더 독트린’을 선언, 군부의 정치개입 악순환을 끊고 민간정부를 정착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납치 위험을 겪고 끝내는 암살됐다. 그의 죽음으로 군부 내에서 피노체트와 같은 우익 ‘정치군인’들이 득세했으며, 결과적으로는 아옌데 정부의 전복으로 이어졌다. 아옌데와 함께, 칠레 민주주의의 굴절을 상징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의 가르침을 통해 배우고 아라야 사령관(Raúl Araya Stiglich)을 통해 확인한 전통을 말입니다. 같은 사회부문에 속해 (민중혁명의) 희생자가 됐던 저들은 지금 자신들의 이익과 특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외세의 도움을 빌려 권력을 다시 탈환하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누구보다도 먼저 이 땅의 겸손한 여성들, 우리를 믿어 준 여성 농민들, 어린이들에게 쏟은 우리의 관심을 알아준 어머니들에게 말씀 드립니다.

저는 또한 이 나라의 참된 전문가들에게 자본주주의 사회를 옹호하는 전문가 단체, 기득권 단체가 저지르는 방해 선동에 맞서 줄기차게 활동한 애국적 전문가들께 말씀 드립니다.

저는 청년들에게, 함께 노래하고 이 투쟁에 자신들의 행복과 영혼을 바친 분들께 말씀 드립니다.

저는 이제 몇 시간 만에 이 나라를 장악한 파시즘에게 박해 받을 칠레인, 노동자, 농민, 지식인들에게 말씀 드립니다.

암살 테러 속에서도 충성을 맹세했던 자들의 침묵에 맞서, 다리를 폭발하고 철로를 절단하며 석유 파이프와 가스 파이프를 파괴하고 있는 여러분께 말씀 드립니다.

 

저들은 위태로운 상황에 있습니다. 역사가 저들을 심판할 겁니다.

 

라디오 마가야네스는 곧 끊어질 게 분명합니다. 그러면 제 차분한 목소리도 더 이상 여러분에게 닿지 않겠지요.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듣게 될 테니까요.

저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겁니다. 적어도 당당한 애국자의 기억 속에 함께 할 겁니다. 민중은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법이지만, 스스로를 희생하지는 마십시오. 민중은 굴종과 박해를 허용해선 안 되는 법이지만, 스스로를 자학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나라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그 운명을 믿습니다. 반역자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이 암울하고 가혹한 순간을 딛고 일어서 또 다른 사람들이 전진할 겁니다. 이걸 잊지 마십시오. 자유로운 인간이 활보할, 더 나은 사회를 향한 크나큰 길을 열어젖힐 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게 저의 마지막 말입니다. 저는 제 희생이 헛되지 않으리란 것을 확신합니다.

결국에는 제가 대역죄인과 비겁자 그리고 반역자를 심판할 도덕적 교훈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10 40, 아옌데 대통령은 대통령 경호대에게 대통령궁을 떠날 것을 명령했고, 대통령의 두 딸을 포함해 대부분의 여성들이 대통령궁을 빠져나갔다. 정오가 되자 쿠데타군의 공군 전폭기에서 대통령궁으로 폭탄이 투하되었다. 공군 전투기의 폭격 이후 지상군도 탱크를 앞세워 모네다궁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쿠데타군이 모네다궁에 진입하고 얼마 후 몇 발의 총성이 들렸다.

 


관저에서 촬영된 아옌데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 그는 최후의 순간에 대통령 경호대까지 외부로 내보내고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소총을 들고 쿠데타군에게 최후까지 저항하다 살해당했다.

 


모네다궁 공격을 지휘한 쿠데타군의 팔라시오스 장군은 혁명위원회에 짤막한 전문을 보냈다. "임무 완수. 모네다 접수, 대통령 사망" 쿠데타군의 선봉돌격대를 따라 들어간 군사평의회 정보국 전직 요원은 미국의 언론인 토마스 하우저에게 "대통령의 유해는 머리가 갈라지고 뇌 속의 것들이 마루와 벽에 튀겨져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군사평의회는 아옌데가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날 이후 새로운 칠레에서는 단 일주일 정도의 기간 동안 3만여 명의 시민이 살해 당했다.


 

살인마 피노체트

 

언급한 쿠데타 후 일주일 동안의 3만여 명의 학살과는 별개로 피노체트의 집권 기간 동안 사망자 3천여 명, 실종 1천여 명, 고문 불구자 10만 명, 국외추방 100만 명에 이른다.

그는 칠레의 권력 수반에 있는 동안 미국과 그 외 라틴 아메리카 독재자들과 공모하여 반체제 인사, 진보진영 인사들을 납치, 구금, 살해, 암매장하는 일명 콘도르 작전이란 것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