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14일

대구매일신문에 괴청년 40여명 난입

산풀내음 2016. 8. 21. 09:33

19559 14,

대구매일신문에 괴청년 40여명 난입

 

1953년 정전협정 이후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정전협정 준수 여부를 감시하기 위해 중립국 감시위원단이 판문점에 파견되어 있었다. 자유 진영을 대표해서는 스위스와 스웨덴이 그리고 공산 진영을 대표해서는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였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연일 학생들을 동원해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는 물러나라는 관제 데모를 주도하였다.

 

대구에서 1955 9 10일 한국의 유엔대사이자 이승만의 측근인 임병직이 대구를 방문하자 수백 명의 중, 고등학생들이 당시 대구의 살인적 폭염 하에서 무려 4시간이나 임병직의 환영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그러자 대구 시민과 학부모들은 불만이 극에 달했고, 대구 지역신문인 대구 매일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 최석채는 당시 태평로에 있던 매일신문사 앞 길거리에서 아침밥도 못 먹고 동원되어 고생하는 학생들을 목격하고 9월 13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고급 행정 관리들이 상부 교제를 위한 도구로 학생들을 이용하는' 행태를 비판했다.

 

 

이러자 대구지역의 정치깡패들의 어용단체인 국민회와 자유당 경북도당에서는 대구 시내에 "대구매일의 이적행위를 규탄한다!", "대구매일의 사설 필자 최석채를 처단하라!"는 문구가 적힌 벽보를 곳곳에 붙였다. 나아가 9 14일에는 국민회 경상북도 본부 명의로 "사설 중 문제된 일부를 취소할 것, 집필자를 처단할 것, 사과문을 대구 시내 4개 일간 신문에 게재할 것"을 요구하는 통고문이 대구 매일신문사에 보냈다.

 

그러나 대구매일이 이를 무시하자 9 14일 오후 4 10분경 국민회 경북도지부 총무차장 김민과 자유당 경북도 검찰부장 홍영섭은 괴청년 20여명을 이끌고 신문사에 난입, 인쇄시설을 파괴하고 발송중인 신문 뭉치를 탈취해갔다. 이날 밤 신문사를 ‘이적단체’로, 자신들의 행위를 ‘애국단체의 의거’로 규정하는 성명서가 삐라로 시내 곳곳에 뿌려졌다.


 

파손된 납활자와 신문제작시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야당들은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국회차원의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주장했고, 이에 따라 진상조사단이 꾸려져 대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경상북도 사찰과장은 국회 진상조사단 앞에서 대낮에 일어난 테러가 무슨 테러요라는 황당한 망언을 하는가 하면, 자유당은 이 사건을 애국적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정치깡패 처벌과 언론 자유 보장 등을 담은 진상조사단의 대정부건의안 제출을 저지하는 한편, 대구 매일신문 테러사건을 "애국적인 행위"라고 규정지었다.

오히려 당국은 매일신문 주필 최석채의 행위를  ‘이적행위’로 몰아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9 17일 최석채를 전격 구속했다.

 

10 14일 구속된 지 한 달 만에 최석채 주필은 풀려났다. 불구속 기소돼 이후 1년간 법정투쟁을 이어나갔다. 결국 12 6일 법원은 최석채 주필에게 무죄를 언도했다.

다음 날 최석채 주필은 '한국민주언론사상에 오점을 찍는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커다란 감명을 금할 수 없다'는 소회를 지면에 밝혔고, '보장된 언론자유의 선() 확정, 본사 최주필에 무죄 언도'라는 기사가 함께 게재됐다. 1956 1 27일 법원은 검사의 공소를 기각, 최석채 주필의 무죄를 확인했고, 1956 5 8일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전원 합의로 최석채 주필의 무죄를 확정했다.

 

이 사건은 정권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신문사의 논설이 자유당의 비위를 거슬려 일어난 언론에 대한 권력의 테러로 평가 받고 있다. 그리고 해방 후 필화(筆禍)사건이 대법원까지 가서 판결을 받은 첫 사례였다.


 

1955 118일 최석채 주필의 1심 공판이 열린 대구지법에서 많은 사람들이 판결을 지켜보고 있다.


1955 12 6, 최석채 주필(가운데)이 언도 공판에서 무죄선고를 받고 풀려난 후 동료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