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14일

공화당, 3선 개헌안 변칙통과

산풀내음 2016. 8. 21. 09:44

19699 14

공화당, 3선 개헌안 변칙통과

 

1961 5·16 군사정변에 의한 군정 아래에서1962 12월 17에 실시된 국민 투표로 제3공화국 헌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 헌법에 따라 1963 10 15일에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박정희가 대통령에 선출되어 1963 12월 17 3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정하고,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게 하고 있었기에, 1967 5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윤보선과의 재 대결에서 다시 박정희가 승리하였지만 문제는 다음 선거였다. 현행 헌법은 재선까지만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제6대 대통령 선거 당선과 함께 3선 개헌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노렸던 김종필과 그를 따르는 민주공화당 내 세력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자 1968국민복지회 사건으로 관련 세력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당시 국민복지회는 회장 김용태를 중심으로 친선단체를 가장하여 정계, 금융계, 언론계 등의 엘리트를 총망라하여 구성되었다. 1968 5 18일 박정희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게 김용태의 동태를 파악할 것을 지시하였고 김형욱은 검찰실장인 방준모를 중심으로 특수조를 편성하여 김용태에 관한 조사를 진행시켜나갔다.

당황한 김용태가 국민복지회와 관련된 중요서류들을 굴뚝 속에 감추었으나 현장을 정찰하던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발견되어 사건의 전말이 명확히 밝혀졌다.


 

김종필과 김형욱

 

특히 송상남(宋相南)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시국판단서'는 국민복지회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 국민복지회는 여당 내의 야당이다. 1967년의 선거부정은 모두 박정희 대통령이 책임져야 하며, 모든 부정부패 역시 그 책임을 박정희 대통령이 짊어져야 한다. 현재의 정세판단으로 보아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위한 개헌공작은 필연적으로 대두될 것이며 우리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저지세력을 확보해야 할 결정적인 국면에 처해 있다.

어쨌든 박정희 대통령이 더 이상 정치에 대한 야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우리는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1971년 선거에 있어서 우리들의 대안은 오직 김종필 당 의장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이미지' 부각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하며 기어이 1971년을 '김종필의 해'로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김종필 당 의장은 이 공동목표를 위해서 정치적으로 책임져야 할 모든 사항을 일체 회피하고 '이미지' 관리에 신중해야 할 것이라고 우리는 판단한다."

 

김형욱은 김용태, 최용두, 송상남 등을 정보부로 연행해 고문했다. 5 25일 김용태와 최영두는 공화당에서 제명되었다. 김종필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해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30일 공화당 의장직과 국회의원직을 모두 사퇴하고 정계은퇴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후 김용태는 이 사건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린다.

"국민복지회 사건은 어떤 특정인의 계보를 잡기 위해서라기보다 한편으로 나같이 공공연하게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세력을 꺾기 위한 것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가슴속에 3선 개헌을 반대할 마음을 먹고 있는 인사들에게 반대하면 이렇게 된다하는, 이를테면 본보기를 보여줄 목적으로 꾸며진 음모였다고 나는 밝히고 싶다."

 

여권 내 반대세력을 제거한 후, 3선 개헌은 보다 박차를 가하였다. 1968 12월 경남도당 개편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을 찾은 윤치영 의원이 처음으로 개헌논의를 공식화하였고 1969 1 6길재호 공화당 사무총장은 헌법의 일부 조항 개정 검토를 여당 내에서 하고 있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1969 1월 초부터 비서실장 이후락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공화당 4인방백남억, 길재호, 김성곤, 김진만등을 중심으로 ‘3선 개헌 필요성을 들고나왔다.

그리고 225일에는 공화당 윤치영 의원은장기집권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부패하는 것은 아니며, 헌법은 정세 변동에 따라 개정할 수 있다고 강변했다. 1968정계은퇴를 강요당했던 김종필도 비겁하게 1969 6월부터 ‘3선 개헌주장에 앞장서자, 박정희 정권은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국민투표에 부쳐 나와 이 정부에 대한 신임을 묻겠다 ‘3선 개헌 추진을 공식화했다.


 

김종필을 견제한 공화당 4인방인 백남억 정책위의장, 김성곤 재정위원장, 김진만 원내총무, 길재호 사무총장(왼쪽부터)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추진에 맞서 당시 야당인 신민당은 ‘5인 호헌위원회’(김의택 전당대회 의장, 조영규 중앙상임위원장, 정헌주 정책위원장, 고흥문 사무총장, 김영삼 원내총무)를 구성하고 유진오 총재가국회의원 총사퇴도 불사하겠다1969 65일 재야인사들과 함께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해 강경한 투쟁의지를 보였지만, 유진산 간사장 등 타협파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어 반대 투쟁이 여의치 않았다.


 

1967년 국회 본회의장에 앉아 있는 유진오(왼쪽). 당시 그는 신민당 총재였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3선 개헌 반대 투쟁이 일어났다. 6 12일 서울대 법대생의 반대 투쟁을 시작으로 19일에는 고려대로, 20일에는 연세대로 확대되었고 7 1일부터는 전국 대학이 들고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 620일에는 괴한들이 김영삼 원내총무의 차에 초산을 퍼붓는 테러가 발생하기도 했다.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해 광화문에서 대기 중인 경찰들

6월 말부터 데모를 벌여 오던 고대생 6백여 명은 데모 4일째인 71 '3선 개헌 절대 반대'라는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나서다가 대기 중이던 경찰기동대의 적극적인 제지로 다시 학교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경찰은 고대생 121명을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연행했으나 그 중 1명만을 즉결에 넘기고 나머지는 훈방했다. 1969 7 1.

 

그러나 정부당국의 종용으로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이 조기방학에 들어가자, 이번에는 고교생들이 나섰다. 710일부터 12일까지 사흘 동안 대구고, 대륜고, 경북고, 안동고, 대구계성고, 경북김천중고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8, 공화당 의원 119명과 신민당 의원 3명이 서명한 삼선개헌안이 발의되었고, 신민당의 반대는 격렬해졌으며 임시국회는 파국을 맞았고, 8월 말 가을학기 시작과 더불어 개학한 서울의 모든 대학에서 다시 시위가 불붙었다.

 

신민당은 유진오 총재 자택에서 긴급 전당대회를 갖고 44명의 국회의원을 당적에서 제명하고 당을 해산시켜 버렸다. 당시 법적으로, 탈당하거나 당이 해산되면 국회의원직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에 남아있던 그리고 당을 배신하고 개헌안에 찬성한 성낙현, 연주흠, 조흥만은 의원직을 상실했고 제명당한 44명은 무소속의원이 되었다.

 

9 8, 헌법개정안은 국회에 상정됐고 13, 표결을 선포했다. 결국 야당은 단상을 점거하고 12시까지 계속 버티기 전략을 펴자 여당은 1969 9 14일 새벽 250분경 야당이 농성중인 국회 본회의장을 피해 국회 제3별관 특별회의실에서 제6차 본회의를 소집, 3선 개헌안을 전격적으로 변칙 통과시켰다.

 

개헌안 표결은 공화당 소속의원을 비롯한 개헌안 발의 서명자 118명 전원과 무소속의 김용태 의원 등 3명과 정우회의 양찬우 의원 등 모두 122명이 참석, 참석의원 전원이 가표를 던져 개헌통과선 114표를 넘었다. 이에 따라 이효상 의장은 개헌안을 가결했음을 선포했다.

 

또 개헌안을 처리하는 절차법안인 국민투표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함에 따라 10 17일 개헌찬반을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 총 유권자 1548925명 중 77.1%가 투표를 했고 이중 65.1%가 찬성, 개헌을 확정했다.



99일 야당인 신민당 의원들의 국회 의사당을 점령하고 밤샘농성을 하는 모습.

3선 개헌에 분노하여 국회의장실 집기를 엎고 있는 당시 김영삼 의원

3선 개헌안 통과 후의 여당의원(한국근현대사 사전)

2분만에 날치기 처리 후 나오는 공화당 의원들

9 14일자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