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22일

링컨 미국 대통령 `노예해방 예비선언` 발표

산풀내음 2016. 8. 24. 20:47

1862 9 22,

링컨 미국 대통령 `노예해방 예비선언` 발표

 

링컨 미국 대통령이 앤티담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기를 잡자 이튿날인 1862 9 22일 ‘노예해방 예비선언’을 발표했다. 1863 1월 1 이후부터 미국 연방정부에 대해 반란 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면 해방한다는 내용으로 이것은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의 여러 주가 연방에 복귀하지 않으면 노예해방을 선언하겠다는 경고였다.

 

선언은 반란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부 해방하며, 해방된 흑인은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임금으로 계속 일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이외에도 흑인들의 연방 군대 입대를 허용하고 있었다. 더욱이 흑인을 북군 병력에 흡수할 수 있게 됨으로 북군이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됐다.

 

자치주가 이에 응하지 않자, 링컨은 1863 1 1일 흑인노예의 해방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선언은 점차적이며 유상적인 노예 해방을 주장하는 링컨과 공화당내 보수파와 즉시 전면 해방과 노예주의 조기일소를 기도하는 진보파와의 타협적 선언이었으며, 동시에 전 세계에 북부의 명분을 표명하는 의도도 있었다.

 

이 선언은 대부분의 북부인들에게는 명분 없는 전쟁이었던 남북전쟁에 도덕적 명분을 부여하였다. 당시 많은 남부인들은 노예제도 찬성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 고향을 지키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북부의 부당한 탄압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분위기였으나, 많은 북부인들에게는 전쟁에 대한 확실한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이 선언으로 북부인들은 자유와 인권을 지키고자 한 미국 독립 전쟁 때와 같은 전쟁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링컨이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면 바로 이 노예해방선언 때문일 것"이라고 했듯이, 후세의 역사도 그의 바램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은 인도적인 명분에서 출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단지 미 연방의 대통령으로서 미 연방을 수호한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전쟁을 결심했고, 선언을 발표했을 뿐이다. 노예해방은 단지 부수적인 산물이었을 뿐이었다.

노예해방의 실현은 북부의 산업 자본가와 남부의 대지주 사이의 경제적 이해대립이 전쟁으로 폭발한 뒤에야 형식적으로 이뤄진 셈이다.



노예해방선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