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22일

이란-이라크전 발발

산풀내음 2016. 8. 24. 20:57

19809 22,

이란-이라크전 발발

 

1980 9 22일 이라크의 선제공격으로 이라크 공군기가 테헤란 등 이란 공항을 폭격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다. 간헐적으로 전개되던 이란-이라크전이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이란과 이라크 간의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 관련 오랜 국경분쟁이다. 샤트 알 아랍은 이라크 남부에서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이 합류하여 이란과 이라크 국경을 따라 200km를 흐르는 강인데 1937년 맺은 국경협정에서 영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이라크에 수로가 귀속되었다.

그러나 1968년 영국이 아랍에서 완전히 철수 한 후 이란과 이라크간의 수로 영유권 문제는 다시 불거지게 되었고 이란의 팔레비 왕은 당시 막강한 군사적 우위를 배경으로 샤트 알 아랍에서 무력시위를 감행하였다.



샤트 알 아랍 수로

 

한편 이라크 내의 군소 부족인 쿠르드족의 무장 독립 투쟁을 저지하는 데 전념하고 있던 이라크는 이란의 압박에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 그 때문에 1975년에 맺어진 알제협정(Algiers Treaty)에서 이라크는 이란이 쿠르드족을 돕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고 수로의 영유권 절반을 이란에게 양보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중동의 맹주를 다투던 이란과 이라크는 1979년 각각 정치적 대격변을 겪는다. 2월에는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친미 팔레비 왕조가 몰락하고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호메이니가 집권했다. 7월에는 이라크에서 향후 중동 정세의 폭풍의 눈이 되는 사담 후세인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집권 후 사담 후세인은 이란의 군사력이 전과 같지 않음을 간파하고 국경을 원래대로 되돌릴 것을 요구하면서 대립이 심화되었고, 이때부터 양국은 국경 근방에서 소규모 군사충돌을 빈번하게 벌였다.

 

또 한편 이란의 호메이니는 이슬람 혁명의 확산을 위하여 이라크 내 시아파(Shia)에게 수니파(Sunni) 정권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후세인은 호메이니의 위협을 차단하기 위해서도 전쟁이 필요했다. 당시 이란은 전체 인구의 93%가 이슬람 시아파이고, 이라크는 인구의 50%가 시아파, 쿠르드족 등 소수민족이 10%, 이슬람 수니파는 40%. 이라크는 소수파인 수니파가 계속 집권하며 다수파인 시아파를 지배했다.

 

 

전쟁이 터지자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일제히 이라크를 지원했다. 이란에 세워진 반미·반서방 이슬람 정권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초기부터 이라크에 막대한 무기를 판매했고, 미국은 이라크의 무차별적인 화학무기 사용과 민간인 학살을 묵인했다. 특히 도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전쟁이 한창이던 1983 12월 도널드 럼즈펠드 특별교섭인을 이라크에 특사로 파견해 지원을 공식화했다.

 

이라크는 전쟁 초기에 도화선이었던 샤트 알 아랍 수로를 장악했고, 곧바로 후제스탄(Khuzestan)의 주요 도시 호람샤흐르(Khoramshahr)와 아바단(Abadan)을 점령하는 등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따라서 이라크는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협상을 제의했지만 이란은 제의를 일축하고 대규모 민병대로 조직해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전쟁은 장기전에 돌입했다. 대부분의 서구 군사전문가들은 단기간 내에 이라크의 승리로 전쟁이 끝날 것으로 예견했지만 이 예견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란의 거센 반격에 후세인은 1982 6월 이라크군을 이란 국경선 밖으로 철수시키게 되었고 이후 전황은 반전되어 이란군의 공세가 이어졌다. 수세에 몰린 이라크는 화학무기까지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1986년 이란군이 걸프 해역의 전략적 요충지인 포 반도(Faw Peninsula)를 공략하는 데 성공한 것이 오히려 이라크군에게 보다 공세적인 전략을 펴도록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87년 이란의 바스라(Basra) 공략 실패 이후 시작된 이라크의 반격은 다시 한 번 전황을 반전시켰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전쟁 개입은 이란을 더욱 불리한 상황으로 몰고 갔다.

 

후세인은 1988 2월부터 2개월 동안 150회에 이르는 스커드 B 미사일 폭격으로 이란의 테헤란 등을 완전히 파괴시켰고, 5월에는 이란에 다시 진입해 이란군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벌인 공세가 바로 알파우 반도 및 미즈노 군도에서의 작전인데, 이라크군의 역량을 우습게 본 이란군은 다시금 큰 피해를 입고 이라크 영토 전역에서 밀려나게 된다. 여기에 국제적 고립 상황에서 이라크 정복은 어렵다고 판단한 이란은 결국 일단 전쟁 전 상태로 돌아가는 정전협정을 통해 전쟁을 끝냈다.

 

이 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에서 일어난 가장 치열한 전쟁 중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8년간 지속되었고 유엔의 중재로 1988 822일 끝났다. 양국은 (비공식) 1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이라크 30만 명, 이란 70만 명)가 발생했고 3천억 달러 이상의 전비가 소모됐다.


Iranian soldiers in Khuzestan during the Iran-Iraq War. 



Iraqi soldiers taken as POWs, poster of Imam Khome liberation of Khorramshahr in 1982. Persistence and martyrdom were key elements of this victory. However, during years that followed the war became institutionalized.


Saddam Hussein inspects an Iraqi position during Iran-Iraq war. BBC Worldwide is marking the 30th anniversary of the war's outbreak. Photograph: A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