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2일

일본, 훈춘(琿春) 조선인 학살 (훈춘 사건, 간도 참변, 경신 참변)

산풀내음 2016. 8. 31. 20:31

1920102,

일본, 훈춘(琿春) 조선인 학살 (훈춘 사건, 간도 참변, 경신 참변)

 

동영상으로 보시고자 하시면 아래의 링크로 감상해 주십시요

 

https://www.youtube.com/watch?v=4cIqJ3ekUFc

1920 10 2일 오전 4. 중국 마적단 400여 명이 중국 지린(吉林) 성 훈춘(琿春) 시를 습격했다. 일본 관청과 상가를 공격해 불을 질렀다. 일본인 13명이 죽고 30명이 부상 당했다. 이에 일본은 마적단 토벌을 위해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19사단 등 2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대거 투입했다.

 

 

 

 

 

그런데 마적에게 납치당했던 일본 상인의 증언에도, 훈춘 일본영사관이 본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도 조선인 가담 사실은 없었지만, 일본 외무성은 마적 중 불령선인(일제가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르던 말) 100여 명이 포함됐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조선인들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조선인 마을을 모조리 파괴했다.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파괴하는 초토전이였다.

 

1920 10 5일을 기점으로 8개월에 걸친 대살육으로 조선인의 피가 강물을 이뤘다. ‘훈춘(琿春)사건’ 간도참변’, ‘경신참변’으로 불리는 일제의 이 무차별 학살로 1만 여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이국 땅에서 죽어갔고 50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가옥도 2500여 채나 불에 탔다. 3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경신대참변을 겪었던 한 조선인은 이렇게 얘기했다. "일본 사람은 잔인한 수준을 넘어서서 사람이 참 악마라는 걸 느꼈다. 갓난아이를 허공에 던진 뒤 총검으로 받아서 어느 정도 깊이 꽂히는가 싱글대던 군인들의 모습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사실 이상한 점은 이전부터 있었다. 일본군은 사건 며칠 전 습격 정보를 입수하고도 경찰 30여 명과 연락병을 철수시켰다. 10 1일 마적이 훈춘 부근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고도 일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마적단의 우두머리 창장하오(張江好)는 친일 마적이었고 마적이 일제의 물자 원조를 받았다는 증언도 속속 나왔다.

 

사실 훈춘 사건은 독립군 제거 및 1920 6월의 봉오동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이었다.

간도는 3.1운동 후 독립군들의 거점이었다. 이 지역 독립군들을 늘 성가신 존재로 여겨오던 터에 봉오동 전투에서까지 크게 패하자 일제는 독립군 소탕에 팔을 걷어붙였다. 극비리에 초토계획을 세웠으나 간도는 엄연한 중국 땅이었다. 구실을 찾아야 했다. 창장하오라는 중국인 마적을 매수해 지린성 옌벤에 위치한 훈춘(琿春)을 급습하는 공작을 진행시킨 것이다.

 

 

조작과 학살이 항일 의지를 꺾진 못했다. ‘훈춘사건’ 20여 일 후 김좌진과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부대가 만주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청산리전투였다. "총구는 조국의 눈이다! 총알은 조국의 선물이다!"고 이범석이 호령하는 가운데 독립군은 일본군 수천 명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간도, 혼춘 일대의 조선인들은 그 앙갚음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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