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5일

유고 시민혁명으로 밀로셰비치 대통령 축출. 코스투니차 대통령 집권문장의 구성

산풀내음 2016. 9. 4. 14:50

200010 5,

유고 시민혁명으로 밀로셰비치 대통령 축출. 코스투니차 대통령 집권

 

'발칸의 도살자'로 불리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šević, 1941 8월 20 ~ 2006 3월 11)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소패권주의를 내세워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 등 발칸 전역에서 전쟁과 학살을 자행, 20만 명을 숨지게 하고 300만 명을 난민으로 만들었으며 유고 경제를 파탄시켰다.

 

1941 8 20일 세르비아 동부 포자레바치에서 그리스 정교 성직자인 아버지와 열렬한 공산주의자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1962년에, 어머니는 1973년에 각각 자살했다. 1964년 베오그라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지방에 있는 공산당 산하기관인 경제연구소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 일하며 공산주의자로 입지를 다져나갔다.



Milošević's father Svetozar and mother Stanislava with brother Borislav and Slobodan as children.

 

티토(Josip Broz Tito, 1892 5월 7 ~ 1980 5월 4) 대통령 시절부터 온건한 공산주의 사상을 체득한 그는 빠른 두뇌회전과 강한 추진력으로 베오그라드에서 정치적 기술을 익혔고 1980년 티토 대통령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 공백을 틈타 강력한 정치지도자로 부상했다.

 

1984년 친구인 이반 스탐볼리치가 세르비아 공산당 새 지도자가 되자 공산당 베오그라드 지구당 위원장에 올랐고, 1987 4월에는 코소보에서 소수인 세르비아계의 불만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민족주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 해 스탐볼리치의 뒤를 이어 공산당 당수가 된 그는 1989년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된 뒤 대 세르비아주의를 제창하며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촉발시켰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에 거주하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킨 그는 세르비아에 의한 유고연방 통치 야심을 드러내며 결국 유고 전역에서 유혈사태를 야기했다.

 

 

 

밀로셰비치는 1997년 유고 연방 대통령이 되었고 이후 철권통치를 휘둘렀고 결국 보스니아 내전코소보 전쟁 당시에 인종청소를 악행을 저질렀다. 그는 악명 높은 절멸수용소를 만든 다음 수용소에 사람들을 끌어다가 놓고서 수많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을 개처럼 가지고 놀다가 죽이거나, 조금 조금씩 고문을 하다가 죽이던지 손톱을 뽑거나 눈알을 빼내서 죽이거나, 여성들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종교적 신념을 없애기 위해서 강간하는가 하면, 강제로 썩은 물질이나 심지어 인육을 먹게 하는 미친 짓거리를 자행했고, 사람들을 총살시키거나 산채로 사람들을 생매장시키는 온갖 만행을 저질렀는데 구 중 하나가 그 유명한 스레브레니차 학살이였다.


 

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전쟁


 

보스니아 내전 중인 1995 7월에 자행된 스레브레니차 집단 학살로 무려 8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인종 청소의 일환으로 땅에 묻혀 학살되었다. 스레브레니차 집단 학살은 제2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단 학살이며, 보스니아의 이슬람 교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르비아군은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집단이라 할 수 있던 스레브레니차 내 이슬람 교도 4만 명을 숙청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군인과 민간인, 성인과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남성 포로들의 개인 소유물과 신원서를 강제로 빼앗았으며, 고의적으로 그들의 종교적 정체성만을 근거로 삼아 살해하였다.

 

그리고 밀로셰비치는 학살뿐만 아니라 독재자답게 부정부패에도 열심이었는데, 횡령한 돈이 무려 10억 달러나 되었다.


 


스레브레니차 학살 발굴 현장

 

그러나 그는 1995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 당시 서방이 경제제재 압력을 가하자 협상에 나서 데이튼 협정에 서명하고, 코소보 사태 때에도 수 차례 나토와의 협상에 응하는 등 현실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악랄한 만행에 대해 국제 인권단체들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1993 설립된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에 밀로셰비치를 비롯한 유고 지도자들을 전범으로 기소할 것을 촉구해 왔고 마침내1999 5 26일 현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연방 대통령이 전범혐의로 ICTY에 기소되었다. 밀로셰비치와 함께 밀루티노비치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 유고 연방군 총사령관, 세르비아 공화국 내무장관 유고연방 부총리 등 유고연방 간부 4명에 대해서도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19993 24일의 나토 유고 공습 이후 지지율이 급락하고 국민적 저항이 거세진 가운데 결국 신 유고연방군이 코소보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1999 6 25일 코소보 전쟁은 마무리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연방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1999 8 19일 수도 베오그라드 중심부의 연방의회 건물 앞에서 열렸다. 10만 명 이상의 대규모 군중이 집결한 가운데 열린 집회에서 시위대는 당기와 세르비아 공화국 국기, 피켓 등을 흔들며 변화와 밀로셰비치의 사임을 요구했다.

 

2000 9 24일 대선이 치러졌고 밀로셰비치는 야권 후보 보이슬라브 코스투니차(Vojislav Koštunica, 1944 - )에게 패배한다. 하지만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선거결과를 조작해 2차 결선투표를 강행하려 하자 유고 국민과 야권은 총파업, 불복종, 항의시위로 압박해 들어갔다.

1989년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의 몰락을 연상시키는 유고사태는 밀로셰비치 13년 독재에 지칠 대로 지친 국민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정실주의와 조직적 부패는 의료보장 등 각종 사회 안전망을 붕괴시켰고, 50%까지 치솟은 실업률은 국민의 생계기반을 흔들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 입장에서도 밀로셰비치 정권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떨어져 나갔고, 수많은 목숨이 희생된 1992년 보스니아내전과 1999년 코소보 사태를 거치면서 유고는 계속 위축돼 갔다.

결국 밀로셰비치는 10 5일에 결과를 인정하고 13년간 유지해 온 권좌에서 물러났고 코스투니차는 7일 베오그라드 컨벤션센터에서 취임식을 갖고 유고연방 대통령직에 올랐다.


 

반정부 시위


보이슬라브 코스투니차

 

이후 밀로셰비치는 2001 4 1일 세르비아 특수경찰에 의해 체포돼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유고연방 세르비아공화국의 블라단 바티치 법무장관은 밀로셰비치가 일단 30일간 구금에 처해졌다고 밝히고, “권력남용 혐의 등이 입증되면 5~15년 징역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미국을 비롯한 나토 회원국들은 지난 1999년 국제전범재판소에 `코소보 거주 알바니아계 주민들 학살 및 강제추방` 혐의로 기소돼 있는 밀로셰비치의 신병 인도를 촉구했다.

 

2001 6ICTY 전범재판소 법정으로 인도돼 이듬해부터 재판을 받아 왔으나, 밀로셰비치는 이 재판을 승리자의 재판이라고 무시하고 "조국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모든 것들이 자랑스럽다"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66건의 전쟁 및 반인륜 범죄 혐의와 1995년 세르비아의 유엔 안전 지대에서 8,400여 명의 이슬람 교도를 대량 학살한 혐의로 기소돼 지난 2002 2월 이후 4년간 ICTY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2006 3 11일 헤이그 외곽에 위치한 ICTY 감옥에서 64세의 나이로 숨진 채 발견되면서 1990년대 발칸반도를 피로 물들인 독재자에 대한 법의 심판도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2002 1월 네덜란드 헤이그에 설치된 유고 국제전범재판소에 출두한 밀로셰비치 전 유고연방 대통령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