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6일

제4차 중동전쟁 발발

산풀내음 2016. 9. 4. 15:13

197310 6,

4차 중동전쟁 발발

 

이스라엘에 당한 3차에 걸친 치욕적인 패배는 주변 아랍국의 정상들에게 아랍 민족으로서 최소한의 긍지라도 찾아주어야 한다는 정치적 의무감을 부여했다.

특히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통째로 빼앗기고 바로 코 앞에서 이스라엘 군대와 대치해야 했다. 이집트 국민들에게 수에즈 운하 건너편에 이스라엘이 구축한 최신 바레브 요새에서 나부끼는 이스라엘 깃발은 한 마디로치욕의 상징이었다.

 

전쟁 패배 두 달 후인 1967 8월 수단에서 열린 아랍정상회의에서아랍의 3가지 No’원칙이 발표되었다. 이스라엘과는 강화하지도 않고, 교섭하지도 않고, 승인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미국은 1970년 미국 주도의 중동 평화협상을 제기했고 여기에 요르단과 이집트가 화답하면서 평화의 물꼬가 트여지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중동전쟁으로 향하는 서막에 불과했다.

PLO 내 조직인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은 이에 항의해 서방 항공기 4대를 유럽 상공에서 납치해 이집트와 요르단 사막에서 폭파하는 강수를 두었다.

 

이에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도 자국 내에 있던 PLO 조직의 소탕작전을 선포했고, 이후 요르단은 내전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에 대한 반발로 1970 PLO 산하에 과격 테러단체인검은 9월단(Black September)’이 조직된다.

이 조직의 이름은 1970 11월 이집트를 방문한 요르단 총리를 카이로의 호텔에서 암살하면서 자신들을검은 9월단으로 부른 데서 유래했다.

한편 이라트의 후세인이 1971 PLO 조직의 완전 소탕에 성공하자 이후 PLO는 레바논으로 본부를 옮기게 된다.

 

오늘날의알 카에다처럼검은 9월단이 전 세계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부각시킨 것은 1972년 서독 뮌헨 올림픽에서 있었던 선수촌 습격 사건이다. 이들은 올림픽 선수촌에 침투해 이스라엘 선수 2명을 사살하고 9명을 인질로 잡고 대치하다가 전원 사살되었고 이 광경은 전 세계 TV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 현장은 20세기 최고의 화약고인 중동 문제를 전 세계인들에게 극적으로 각인시키는 장이 된 것이다.

 

1970 나세르(1918-1970)심장마비로 급사하자, 뒤를 이어 이집트 대통령 자리에 오른 안와르 사다트(1918-1981)는 나세르와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서방국가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면서도 아랍국의 단결을 도모했고, 구태의연한 국내조직을 개혁하기 위한 시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잃어버린 시나이 반도를 되찾기 위한 움직임도 보였으나, 이스라엘의 무성의한 반응에 결국 전쟁을 통해 시나이를 회복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1960년 나사르와 사다트

 

사다트는 먼저 아랍간의 결속 강화에 노력하여 1971 9월에 시리아, 리비아아랍 연방 공화국을 결성하고, 1972 4월에는 요르단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PLO를 추방한 요르단과 단교하는 것으로 아랍 맹주의 지위를 강화했다.

 

1973 10월 6, 당일은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휴일인 욤 키푸르로, 이스라엘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날이었다. 이날, 이집트와 시리아 연합군은 이스라엘 국방군에 대해 기습공격을 개시했다.

 

이집트 군은 수에즈 운하에서 격렬한 포격을 실시하고 소방펌프를 이용한 창의적인 작전으로 이스라엘의 바레브 라인을 단숨에 돌파해서 시나이 반도로 진출, 이스라엘의 거점을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기습에 대한 대비가 부족해서 초반에 대패를 당했고, 10 8일에 있은 이스라엘 측의 반격도 대전차 미사일지대공 미사일로 무장한 이집트 군에게 격퇴되었다.

골란 고원의 시리아군은 이스라엘의 2개 여단 및 11개 포대에 대하여 5개 사단과 188문의 야포로 공격해 나왔다. 서전에서 약 180대의 이스라엘 군 전차가 1,400대 이상의 시리아군 전차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압도적인 전력차이에 더해 시리아군 전차대의 장비 우수성으로 열세에 있었지만 분투 끝에 이스라엘 군 기갑대는 골란 고원의 방어에 성공했다.

 

이스라엘군은 개전 6일만에 미국의 지원과 함께 시리아군에 대한 총반격을 개시하여 시리아군을 패배 시켰다. 시라아군은 골란 고원에서 800대 이상의 전차를 잃고 철수하고 말았다. 그 뒤 시나이 반도로 전력을 이동시킨 이스라엘군은 16일 새벽 이집트군의 방어선을 뚫고, 수에즈 운하를 도하하여 수에즈市를 점령함으로써 초반의 패배를 만회했다.


 

파괴된 시리아군 전차.



Egyptian military trucks cross a bridge laid over the Suez Canal on October 7, 1973, during the Yom Kippur War/October War



4차 중동전쟁에서 처참하게 파괴된 이스라엘 전차

 

10 25 UN 안전보장 이사회에서는 UN군의 긴급 파견을 결정하고 28 UN 1진이 수에즈운하에 도착함으로써 제4차 중동전쟁은 마무리를 지었으며, 11 11일 이집트-이스라엘은 휴전협정에 조인하게 되었다.

 

4차 중동전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긴 했지만, 아랍인들은 과거의 전쟁과는 다르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았다는 데서 오히려 만족하고 민족적인 긍지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여파는 아랍 산유국들이 미국 등 서방에 대해 석유 금수 조치로 석유를 무기화하는 결과를 낳아, 1년 사이 원유값이 4배나 폭등하는 등의 전세계적인 오일쇼크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계기로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쟁을 위해 미국은 22억 달러 상당을 이스라엘에 지원했으며 소련은 35억 달러를 아랍국에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전쟁에 이집트군의 일원으로 북한 조정사 30명이 소련제 미그 21기를 몰고 참전하였으며 군사고문단이 작전을 기획하고 지도했다는 사실이 이후 밝혀지기도 했다.



4차 중동전쟁 욤 키푸르 전전에 참전한 북 공군조종사들의 활약을 소개한 AP통신 1973년도 기사


4차 중동전쟁에 참전한 북 조종사들


4차 중동전쟁을 주도했던 사다트가 1979카터 미국 대통령을 증인으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조약에 조인 후 이스라엘 베긴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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