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6일

중국 4인방의 몰락

산풀내음 2016. 9. 4. 15:18

197610 6,

중국 4인방의 체포와 몰락

 

1976 106일 장칭(江青, 마오쩌둥 부인, 중앙문혁소조 부조장, 중앙정치국 위원), 장춘차오(張春橋, 부총리,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야오원위안(姚文元, 중앙정치국 위원), 왕훙원(王洪文, 당 부주석,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등 이른바 4인방이 체포되었다.

이로써 1966 5 16 중국 공산당의 중앙위원회 주석이었던 마오쩌둥의 제창으로 시작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엄청난 후유증과 역사적 과제를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장칭, 야오원위안, 장춘차오, 왕훙원(왼쪽상단부터 시계방향).

 

1975 4월 중국공산당 창설 멤버 둥비우(董必武), 12월에는 마오의 측근으로중국의 베리아로 불렸던 캉성(강생)이 세상을 떴다. 그리고 19761월에는 저우언라이(周恩来, 78)가 타계했고, 7월에는 홍군의 아버지 주더(朱德, 90)가 숨졌다.

마지막으로 1976 9 9일 마오가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5·4세대의 중국 공산주의 혁명가들은 모두 사라지게 됨과 함께 문화혁명을 주도했던 4인방은 정치적 버팀목을 잃었다.

 

1976 4월의 제1차 천안문 사건 이후 급진파 4인방과 당 제1부주석 겸 수상 화궈펑(華國鋒), 당 부주석 예젠잉(葉劍英) 등과의 대립이 심각했는데 모택동 사후 4인방은 고립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강청 등이 ‘강청 당주석, 장춘교 수상’ 계획을 준비하고 있던 중 화궈펑과 예젠잉 등이 이를 사전에 알고 이들을 체포했다.

 

106일 저녁 640분 특무부대장인 왕둥싱(汪東興)은 중난하이(中南海)의 회의실인 화이런탕(懷仁堂) 각부를 접수했다. 이어 저녁 7시 화궈펑(華國鋒) 총서기와 예젠잉(葉劍英) 국방부장이 화이런탕에 도착했다. 이들은 4인방을 화이런탕에 한 명씩 불러들여 체포할 계획이었다.

 

755분 장춘차오가 가장 먼저 화이런탕에 도착했다. 장춘차오가 화이런탕에 들어서자마자 제1행동소조가 공손히 맞았다. 행동소조가 장춘차오가 데려온 경호원들의 진입을 제지했다. 장춘차오는 평소와 다른 상황을 인식했지만 왕둥싱의 설명을 듣고 어찌할 수 없었다. 장춘차오가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화궈펑은 체포결정문을 읽었다.

결정문은 "마오쩌둥 사망 후 4인방이 서로 결탁하여 당권을 빼앗을 음모를 획책해 반당, 반사회주의의 죄를 저질렀으며, 중공중앙은 장춘차오, 황훙원, 장칭, 야오원위안 등에 대해 격리심사를 진행할 것이다"였다.

화궈펑이 결정을 읽은 후 장춘차오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고 압송되었다.

 

뒤이어 왕훙원이 도착했다. 왕훙원은 체포될 때 "나는 회의 참석하러 왔다. 너희들 뭐 하는 것이냐"고 외치며 극렬히 저항했다. 왕훙원을 제압한 이후 화궈펑은 결정문을 다시 읽었다. 왕훙원은 화궈펑이 다 읽기 전에 예젠잉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이내 곧 저지됐다.

이미 두 명이 체포된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그 다음으로 회의실로 들어서는 야오원위안을 복도에서 체포했다. 경비단 부단장이 중앙결정을 읽자 야오원위안은 고개를 떨군 채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다.

 

체포조는 이날 저녁 830분 장칭(江青)의 숙소를 찾았다. 장칭 체포조는 왕둥싱의 조수였던 장야오츠(张耀祠)가 이끌었다. 그는 오랜 기간 중난하이 경비를 맡았던 인물이다. 장칭의 거주지에 진입해 그를 체포하려 하자 장칭은 "누가 시켰나"라고 분노했지만 결국 순순히 체포됐다.

 

체포된 4인방은 각각 중남해 지하실에 수용되었으며 중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역사적 체포극은 불과 1시간 반 만에 막을 내렸다.

 

장칭(江靑) 1980 11월 베이징에서 열린 재판에서 "내가 한 모든 일은 마오쩌둥이 시킨 것이다. 나는 마오쩌둥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물었다"며 모든 일은 남편인 마오쩌둥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리고 1981에 열린 최종 판결 결과 장칭과 장춘차오에게는 사형, 왕훙원에게는 종신형, 야오원위안에게는 20년 형이 선고되었다. 4인방 외에도 그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천보다마오위안신에게도 각각 18년 형과 17년 형이 선고되었다.

장칭은 1991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왕훙원은 1992년 병으로, 장춘차오는 2005년 위암으로 야오원위안은 2005년 당뇨병으로 장칭을 따라 갔다.


문화대혁명 4인방에 대한 재판장면. 앞줄 왼쪽부터 장춘차오, 왕훙원, 야오원위안, 장칭

'역사속에 오늘, 10월 > 10월 6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4차 중동전쟁 발발  (0) 2016.09.04
첫 유성영화 `재즈 싱어` 개봉  (0) 2016.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