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16일

중국공산당 대장정 시작

산풀내음 2016. 10. 5. 20:42

193410 16,

중국공산당 대장정 시작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질 당시, 중국 공산당은 불과 200명도 못 되는 군소 정당이었다. 그러나 국공합작 이후로 국민당 명의로 여러 활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발언력을 확장해나갔고 이 과정에서 국민당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공산당을 추방해야 한다는 강경론적인 입장이 대두했지만 쑨원은 이에 결사 반대하였다. 그러나 1925 3월 쑨원이 사망하자 이에 대한 반발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편 국민당 좌파는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한편 1926 7월에 시작된 장제스의 북벌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1927 3월 상하이와 난징이 국민혁명군의 손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간 중국공산당의 무서운 성장세를 두려워한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 우파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중국 공산당과 노동자, 농민 조직을 무력으로 섬멸하였다. 그 결과 중국 공산당은 기존에 상하이를 위시해 도시 노동자 사이에서 갖던 세력을 거의 상실했다.

국민당 좌파가 장악하고 있던 우한의 국민정부는 장제스의 쿠데타에 강력 반발했다. 하지만 군권을 장악한 난징 국민 정부는 우한 국민정부를 흡수, 통합하였으며 이후 국민당은 4.12 쿠데타를청당(凊黨)’으로 표현했다. 결국 이 쿠데타는 1차 국공합작의 와해로 이어졌다.

 

중국 공산당은 당시 도시보다 몇 십 배나 거대하며 봉건제도의 모순으로 절대 빈민층인 농촌을 기반으로 다시 세력을 모아 1931 11월에는 인구 250만의 장시성 루이진 지역에서 정부 주석 마오쩌둥, 부주석 장국도, 군사위원회 주석 주더를 선출하면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 정부 성립을 선언한다. 1933년에는 상해의 당 중앙도 이곳으로 합류했다.

 

무너진 줄 알았던 중국 공산당이 국가까지 수립하여 세력을 다시 키워 나아가자 중국국민당 정권은 재차 공산당 해방구와 유격근거지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준비한다. 그러나 지역민의 인심을 얻은 공산당에 대한 국민당군의 토벌작전은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국민당군은 장시성에 자리 잡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봉쇄하고 지구전을 벌였다. 70만여 명의 대군으로 소비에트 주위에 철조망과 시멘트 요새를 설치, 물샐 틈 없는 포위망을 치면서 소비에트 지역이 점점 생활 필수품과 의약품 등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게 되었고 지배영역과 군사가 축소되자, 공산당 지도부는 마침내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중국 남부의 장시성푸젠성 일대의 근거지를 버리고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마침내 1934 10월 16중국 남부 장시성 서금 소비에트 8만 명의 중국 홍군(중국 공산당 군) 제1 방면군군수품과 온갖 물자를 등에 지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제1방면군의 지도자는 소련의 견제로 마오쩌둥이 아니라 저우언라이였고, 서남쪽을 돌파 후 남은 병력은 부상자를 포함하여 2 8천명 수준이었다. 이후 제1방면군은 사천성 북부의 제4방면군과 합류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장개석 또한 이를 분쇄하고자 최선을 다하였다.

1938 1월 가까스로 준의에 도착해 중대한 회의가 열렸다. 마오는 국민당군의 포위공격에 대한 공산당의 전술을 비판하였고 이는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마오쩌둥은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홍군은 1935 5월에 마침내 양자강을 건너 부대를 다시 3개로 나누고 국민당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소부대 단위로 이동했다. 그들의 추격군의 예상을 뛰어 넘어 귀주의 산악지역을 넘었으며 마냔 도망만 가는 것이 아니라 기습적인 공격도 감행해 추격을 저지시키기도 했다. 대도하 위에 걸리 노정교를 건넜고 해발 4000m가 넘는 대설산을 넘어 7월에는 제4방면군과 그리고 10월에는 제2방면군과 감숙성에서 합류하였다.

 

마오쩌둥, 주은래(저우언라이)주더, 린뱌오, 펑더화이 등이 이끄는 홍군 제 1방면군이 1935 10옌안에 도착해 자리를 잡기까지 행군한 거리는 무려 9600킬로미터나 되었으며, 당초 출발자 중에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인원은 불과 7천 명뿐이었다. 이와 함께 1935년 후반 홍군의 최대세력이던 제 4방면군도 장개석의 집중타격 대상이 되어 2/3이 병력을 잃기도 했었다결국 1, 2, 4방면군이 합류한 홍군은 약 3만 명이 되었다.


 

1934년 국민당군의 포위공격에 전멸당하지 않기 위해 장시성 루이진 근거지를 포기하고 ‘장정’에 나서기 위해 모인 중국공산당 공농홍군들.


대장정 중인 마오쩌둥


대도하 위에 걸린 노정교(루딩교)


대장정을 마치고 생존자들에게 연설 중인 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