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17일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사망

산풀내음 2016. 10. 5. 21:21

196710 17,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사망

 

일생에 세 번이나 황제 자리에 올랐던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19062월 7 ~ 196710월 17) 1967 10 17, 파란 많은 61년의 생을 마쳤다.


 

마지막 황제 푸이

 

190812 2일 두 살의 나이로 황제자리에 올랐지만 191110월 10에 일어난신해혁명(辛亥革命)의 여파로 인하여 이듬해19121월 1 쑨원(孫文)중화민국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청나라황실을 위협하기 시작하자 1개월 후19122월 12 청나라의 멸망과 함께 퇴위하였다. 286년간 지켜온 사직(社稷) 2000년 이상을 유지해온 황제 지배체제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1917년에 7월 1 복벽사건으로 황제에 재 추대되어 잠시 황제자리를 되찾았으나 ‘12일 천하’일 뿐이었다.

 

이후 푸이는 1924년까지 마지막 황제로서 쯔진청(紫禁城)에서 생활했고 그 때까지 형식적인 황제의 칭호는 유지되었다. 푸이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중국통인 가정교사 존스턴(Jhonston)의 영향으로 유럽식 생활방식에 익숙해졌다. 변발을 자르고 양복과 가죽구두를 좋아했다. 자전거 타기를 좋아해 고궁의 문턱을 모두 없애도록 했다. 16살의 푸이는 동갑인 완룽(婉容)과 혼인을 하게 된다. 이후 14살의 원슈(文绣)를 둘째 왕비로 맞이하게 된다. 왕룽은 질투가 심해 원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원슈는 쯔진청에서 나와서 생활을 하다가 결국 푸이와 이혼하였고 1950년 병사했다.


 

존스턴과 완룽, 잉그램

 

1924 11 5일 쯔진청에서 쫓겨나오며 1925 2 23일 톈진의 일본공사관으로 가게 된다. 그는 기차로 베이징을 떠나 톈진(天津)에서 7년 동안 아파트 생활을 한다. 그는 톈진에서 서양인들의 고급 연회장소에 참석해 골프를 배우기도 했다.

 

푸이는 왕조 회복을 위해 일본군인, 정치인들과 접촉하고 일본이 왕정복고의 가장 확실한 지원군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을 했다. 이것이 푸이가 일본제국주의의 품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일본은 푸이를 이용해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 동북지역을 독차지할 생각을 하게 된다.

 

1931 일본 제국 관동군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지역을 점령하였고, 1932 3월 1 일본은 푸이를 황제로 내세워 일본 제국에 철저히 종속된 괴뢰국가였던 만주국을 세웠다. 푸이는 1932 3 8일 오후 3시 일본특무의 엄밀한 감시하에 창춘(長春)에 오게 된다. 이 때 연호를 대동(大同)이라 하고 집정을 선언했다. 1932 9 15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를 체결하면서 동북지역의 주권과 영토를 조건 없이 일본에 넘기게 된다. 푸이는 1932 5 3일 국제연맹 조사단에 일본이 원하는 대로 답변을 한 뒤 1934 3 1일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한다.


 

푸이의 만주국 집정 취임식 (1932)

 

푸이는 일본을 두 차례 방문했는데 1935 4 3일 제1차 방문에서 신사참배를 하고 전쟁 중에 부상당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다. 그리고 1940 6월에는 두 번째 방일을 했다. 중국 침략을 노리는 일본에 ‘청조 부흥’의 환상에 젖어 있는 푸이야 말로 최고의 홍보상품이었고 그래서 방일한 푸이를 일본은 지극정성을 다했다.

 

이런 와중에 푸이는 완룽을 못마땅하게 여겨 귀족 출신의 탄위링(谭玉龄)1937년 귀인으로 맞는다. 탄위링은 솔직하고 순수한 성격으로 푸이의 호감을 샀다. 그러나 돌연 1942년에 병사하게 되는데 실제로 알려진 대로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인지 아니면 일본 관동군이 살해한 것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푸이는 자서전이며 반성문이기도 한 <내 인생의 전반부(我的全半生)> '가장 사랑했던 위링(我的最亲爱的玉龄)'이라 토로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일본 혈통의 여자를 푸이과 결혼시키려 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푸이는 결국 1943년에 평민 출신의 리위친(李玉琴)을 새로운 부인으로 맞이한다.


 

푸이(溥儀)는 세번째부인인 탄위링(譚玉齡)을 가장 총애했는데 탄위링은 22살의 나이로 병사했다.



푸이의 4번째 아내, 리위친

 

만주국은 1941 12 8일 태평양전쟁 발발이후 만주의 물자를 일본에게 지원하는 전쟁보급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 푸이는 일본이 패망한 뒤 1945 8 19일 푸이가 일본으로 도주하는 도중 선양(瀋陽)공항에서 소련군에게 체포돼 소련에서 5년의 감옥생활을 한다.

 

푸이는 1950 7 21일 중국에 돌아온 뒤 푸이는 푸순(抚顺) 전범관리소에서 교육받고 소위 정신개조 과정을 거쳐 1959 12 4일 마오쩌둥(毛泽东) 주석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어 북경식물원의 노동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비로소 ‘땀’이 무엇인지를 처음 경험했다.


 

전범 푸이는 황제 시절 학대했던 네번째 부인 리위친이 면회 오는 것을 좋아했지만 결국은 이혼당했다. 붓으로 자술서를 쓰는 푸이. 1954, 푸순(撫順).


그리고 1962 4 30일 중국인민정부의 소개로 항저우(杭州) 출신 간호사인 리슈씨엔(李淑贤)과 결혼했다. 1967년에 푸이가 사망하기까지 그들은 꽤 다정하고 평범한 결혼생활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망인 리슈씨엔은 1997년 사망했다.


 

주은래, 푸이 그리고 마지막 부인 리슈씨엔(李淑贤)


 푸이의 삶을 영화화한 마지막 황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