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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혁명가 김산, 중국공산당에게 처형

산풀내음 2016. 10. 8. 09:47

193810 19,

비운의 혁명가 김산, 중국공산당에게 처형

 

비운의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이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반혁명 간첩 혐의로 몰려 1938 10 19 33세의 젊은 나이로 처형됐다.

 

김산은 혁명가였고 시인이었으며 사상가였고 마르크스주의자였다. 1905 3 10일 평양 근교 용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더 많은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일제의 만행을 확인하고 1921년 만주의 군사학교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변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젊은 항일 급진주의자와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등에 영향을 받으며 지하 혁명운동에 가담했다. 특히 1922년 그의 가장 절친한 벗이기도 한 김충창(본명 김성숙)을 만나 공산주의를 알아간다. 불과 18세 남짓한 1923년에는 공산청년연맹에 가입해 공산주의 잡지인 ‘혁명’을 간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1925년 가을 김산은 혁명 전야인 광저우에 도착한다.

 

1925년 말 그는 광주에 있는 황포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한편, 후에 손문대학으로 바뀐 학교에서 경제학과 사회발전 역사를 공부했다. 1927 12월 김산은 광동코뮌에 참가했으며, 공산당이 패배한 뒤에는 테러가 난무하는 와중에서 빠져 나왔다. 1928 9월 천신만고 끝에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돌아온 김산은 1929년에 북경(베이징)으로 가 북경의 북평시 지구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또 중국 아가씨인 유령(劉玲)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이후 중국 공산당과 조선 공산당을 연결하는 작업을 하는 등 활발한 조직 사업을 벌인다. 2년여를 무사히 활동했지만 더 이상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1930 11 20일 장제스의 비밀경찰에 체포돼 일본 영사관으로 압송됐다가 이듬해 4월 풀려나 북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1933년 4월 김산은 일본 스파이로 오인되어 다시 중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일본 영사관에 넘겨졌다. 이후 조선으로 이송되었지만 비교적 빨리 풀려나 1934년 1월 다시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김산은 자신과 함께 체포되었던 조아평이라는 중국 여자와 결혼했다. 두 번째 귀환은 그가 일본의 스파이라는 의심을 더욱 가중시켰다. 1935년 말경 상해로 가 이곳에서 공사주의자들을 골격으로 하고 무정부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을 참여시키는 조선 민족해방동맹을 창설했다. 그리고 1936년 8월 김산은 공산당의 정착지인 옌안(延安)으로 향한다. 

 

옌안에서 그는 홍군 전사를 기르던 군정대학에서 교수로 일한다. 이곳에서 그는 님 웨일즈를 만나는데 22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인생 여정을 설명한다. 물론 보안의 문제가 있어서 출판시기를 2년 뒤로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님웨일즈는 위대한 전사의 미래를 의심치 않고, 돌아가 저술 작업을 한다.


김산과 님 웨일즈(헬렌 포스터 스노우의 필명)


미국의 젊은 여류작가 님웨일즈에 의해 저술된 ‘아리랑(Song of Arirang), 이 책은 김산이 살았던 당시의 시대상과 그의 행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있다.

 

하지만 김산은 구금기간이 예상보다 짧아 공산당 간부들은 그를 일본 간첩으로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의 당적복권은 보류됐다. 결국 김산은 트로츠키파 축출을 위한 이른바 '서간공작'에 연루돼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 후 1983 1 27일 중국공산당이 "김산에게 덮어씌운 누명을 벗기고 명예와 당적을 회복시킨다"고 선포함으로써 45년 만에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고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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