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사건

산풀내음 2016. 10. 8. 09:53

194810 19,

여수, 순천 반란사건

 

1948 10 19일 밤 8. 전남 여수 주둔 제14연대 연병장에 2500여명의 장병들이 집결했다. 이윽고 “경찰을 타도하자”는 구호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자 장병들은 “옳소”라며 호응했고 반대한 3명의 하사관은 현장에서 사살됐다.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병사들이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제주도에서 일어난 4.3항쟁을 진압하라는 파병 명령을 거부하고 주둔지인 여수에서 봉기한 것이었다.

 

이 봉기는 남로당과 사전에 연락을 갖고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 아니라 14연대 남로당 세포원들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남로당 중앙은 물론이고 전라남도 도당이나 여수·순천지역의 지역당까지도 사전에 봉기 사실을 알지 못했다.

 

14연대 봉기는 매우 빠르게 파급되었다. 19일 늦은 밤에 시작된 봉기는 다음 날 동트기 전에 여수를 점령했고 아침에는 순천에 진입하였다. 순천에는 인근 지역에서 지원 나온 경찰관들이 봉기군을 막으려 애썼지만 봉기군은 경찰보다 더 많이 불어났다.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홍순석이 지휘하는 14연대 파견대가 봉기에 합류했을 뿐만 아니라 멀리 광주에서 진압하러 나온 4연대 소속 병사들도 봉기군에 합류했던 것이다. 며칠 만에 여순사건은 광양, 구례, 보성(벌교)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당시의 군은 미군정의 남로당 해산령을 피해 군에 입대한 좌익들에 의해 적화돼 있었고, 남로당은 군을 정치투쟁의 공간으로 활용하려 했다. 그리고 지방 좌익 세력과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광범한 민중봉기로 발전하였고 거리는 온통 인공기로 물결쳤으면 이들은 남한 정권을 완전히 부정하였다.


 

반란군들이 살해한 우익인사들의 유해

 

 

 

정부는 22일 계엄령을 선포, 38선 경계병력을 제외한 남한의 모든 군대로 진압군을 편성했다 가까스로 순천을 탈환했지만 여수는 강력하게 저항했다. 두 차례의 진압이 모두 실패하자 26일에는 바닷가 경비정에서 대대적인 포격을 가하며 상륙을 시도했다. 27일에야 9일 동안의 반란사건이 겨우 진압됐으나 2,300여 명이 사망했고, 2.800여 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진압군

반란군과의 구별을 위해 흰 머리띠를 한 토벌군


여수 장악 이후 협조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최소 400명 넘는 억울한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반공 체제 구축에 나섰으며, 군대 내의 공산주의자를 색출해 척결하고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좌익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에 나섰다. 도망친 반란군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며 6·25를 맞았다. 한국전쟁의 서곡이었다.


무고한 시민까지 빨갱이로 몰아서

부역자 색출을 위해 학교 운동자에 주민을 모아두고 있음

 



 

 

빨치산의 역사

http://blog.daum.net/gmania65/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