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23일

헝가리, 반소(反蘇) 봉기

산풀내음 2016. 10. 8. 18:51

195610 23,

헝가리, 반소(反蘇) 봉기

 

1946년 헝가리는 소련에 의해 공산화되었고 라코시 마차시(Rákosi Mátyás, 1892-1971)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스탈린의 제자로 자처하면서 7000여 명의 반대파들을 숙청하는 등 독단적 억압통치를 자행하였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그의 철권 통치에 대한 비판이 일면서 소련이 동구권에 대해 약간의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자 폴란드, 헝가리 등에서 반소 자유화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헝가리는 이미 10세기부터 라틴 카톨릭을 수용해 서부 유럽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많은 사람이 카톨릭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정치적·이념적으로 공산주의 국가가 됐지만 내부적으로는 반 소비에트 자유화 열망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라코시의 권력은 힘을 잃게 되었고, 결국 1953 7월 라코시가 당 총서기로 물러나고 개혁주의자 너지 임레(Nagy Imre, 1896-1958)가 총리에 올랐다그러나 너지가 자유화 정책을 펴면서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자 당권을 장악하고 있던 라코시는 너지 수상을 우익편향이라는 이유로 1955년 전격 해임하고 자신이 수상에 재 취임해 시계추를 과거로 돌려놓았다.


 

라코시 마차시()와 너지 임레()

 

1956 2,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으로 동구권에 또 한번 희망이 싹트자 그 해 6월 폴란드가 첫 반소(反蘇)봉기의 불을 지폈다. 폴란드 반소 운동은 이미 1951년 ‘사회주의로 가는 폴란드의 길’을 주창하면서 폴란드 공산당 해체에 저항하다 체포됐던 개혁파 민족 공산주의자인 고물카가 당 제1서기에 선출되면서 일단 마무리됐다.

 

그러나 폴란드 반소 봉기는 그때까지도 계속 강압 정치를 펴고 있던 헝가리의 라코시 정권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1956 10 6일에 1949년 라코시 정권에 의해 처형된 러이크 라즐로(Rajk László)의 이장식이 열리면서 혁명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고, 결국 10 23일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10만 여명의 학생과 시민이 연대해 스탈린 동상을 파괴하면서 소련군 철수, 너지 복귀, 자유선거 실시 등을 요구하면 시위를 일으켰다. 그런데 시위 진압 차 출동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사망자가 생겼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혁명은 본격화되었다.

 

진압 경찰 사망과 라디오 방송국 점령 등 사태가 악화되자 라코시는 무마책으로 너지를 총리로 다시 앉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엄령 선포와 소련군을 끌어들였다. 10 24일 헝가리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이 부다페스트에 진입하면서 시민군과 소련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헝가리군 일부가 시민군에 편입하면서 봉기는 격화된다. 10 25일에 들어서면서 봉기는 부다페스트뿐만 아니라 헝가리 주요 도시로 번지고 다음날 의사당이 시민군에 의해 점거되면서 라코시, 게뢰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소련으로 도망가고 너지 임레를 중심으로 한 신정부가 들어선다.


소련에 정보를 제공한 공산주의자를 처형시킨 헝가리 시민군



에리카는 1956년 당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요리 과목을 배우는 15세의 학생이었다. 그녀는 소련의 강압적인 공산주의에 반대하며 자유화의 물결이 일어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탱크를 앞세워 무력으로 침공하여 포탄과 기관총탄을 뿌리며 국민들을 살육하는 소련군에 대항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장 봉기에 나섰다.



) 헝가리 국기와 우)헝가리 혁명군 기, 헝가리 인민공화국 국기에서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가운데에 구멍을 뚫었다.



국기 가운데에 난 구멍은 시민군이 저항의 의미에서 공산당의 상징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이 가운데에 구멍이 난 헝가리 국기는 이후 혁명의 상징이 되고 해마다 헝가리에서는 10 23일이 되면 이 국기를 혁명 기념 공식 행사에서 게양한다. 이렇게 국기에 공산당의 상징을 도려내는 행위는 33년 후 루마니아에서 차우셰스쿠 정권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재현된다.

 

10 28일부터 전투가 일시 중지되었고, 10 30일 소련군 철수에 이어 11 1일에는 신정부가 일당제 폐지, 헝가리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 소련군의 헝가리 철군 요구를 골자로 한 개혁 정책을 발표한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이를 거부하고 11 4일 소련군은 탱크를 앞세워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침공한다. 헝가리의 시민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11 11일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약 2주 간에 걸친 혁명은 엄청난 희생자를 내고 끝나게 된다. 3,000여명이 사망 혹은 실종되었으며 부상자는 1 3천에서 2만 여명에 달했다.


 

부다페스트 시내로 침공해 들어오는 소련군의 T-55 전차대

 


너지 임레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루마니아로 압송되고 1958 6 16일 비밀리에 처형당한다. () 헝가리 외무장관 예센스키 게저(Jeszenszky Géza)에 의하면 너지처럼 혁명 이후에 처형된 헝가리인의 숫자는 350명이 넘었다. 너지의 시신은 비밀리에 매장되었고 공산 정권이 붕괴되던 1989년 정식으로 복권되어 6 16일 부다페스트에서 31년 만에 정식으로 장례식이 열려 안장됐다.


1989년 너지 임레 장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