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10.26 사태)

산풀내음 2016. 10. 9. 22:57

197910 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10.26 사태)

 

1979 10 26일 저녁 735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했다. 박정희는 62세를 일기로 서거했고, 1961 5·16군사정변으로부터 만 18 5개월 10일 만의 일이었다.


좌로부터 김재규, 박정희, 차지철

1975 10 14일 영동고속도로 개통 테이프를 끊은 직후 사진, 박정희 대통령 뒤로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건설부장관. 김재규 뒤로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 경호관.

 

문제의 발단 중에 하나는 김재규(육사2, 1926-1980)와 차지철(육군포병간부후보생, 1934-1979) 간의 갈등이다. 차지철은 1974 8 15일 발발한 육영수 여사의 피격 사건 이후 박종규 경호실장 후임으로 8 22일 경호실장으로 임명돼 경호실을 권력의 중심으로 키워나갔다.차지철은 이후 국회, 행정부, 군 인사 등을 좌지우지하고 야당에 정치 공작을 피는 등 국정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2친자로서의 위세를 떨쳤고 유신시절 내내 지나친 월권행위로 야당은 물론 여당인 공화당으로부터도 원성을 많이 샀다.

 

이런 상황에서 1979 10 4일 김영삼 의원의 국회의원직 제명이 발단이 되어 10 16일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나자 부마민주항쟁 처리 문제를 놓고 갈등이 증폭되었다


당시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전국의 대도시로 뻗어나갈 가능성이 높은 민란으로 파악하여 박정희에게 보고했지만, 박정희와 차지철은 북한 간첩의 개입 내지는 김영삼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불순한 사건으로 호도하고 대형 학살을 예고하는 언행을 했다즉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그럴 경우 발포를 하겠다고 버럭 화를 냈고, 차지철 역시 캄보디아에서 3백만 정도 죽였어도 까딱 없으니 데모대 1~2백만 정도 죽여도 걱정 없다"고 부추겼다. 또 차지철은 "데모대를 탱크를 동원해서라도 강압적으로 눌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마항쟁

 

운명의 1979 10 26일 당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당진에 있는 중앙정보부 시설에 가려 했다. 당진 송신소 건물은 중앙정보부 에서 관리하는 건물인 바, 부장인 김재규가 당일 아침 완공식(삽교천 포함)에 참석할 의사를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전화로 밝혔지만, 차지철은 "지금 시국이 어느 때 인데 중정 부장까지 자리를 비우면 어쩔 것이오? 김부장은 그냥 서울이나 잘 지켜 주시오" 라면서 단칼에 끊어버렸다.


그 결과 방조제 준공식은 김재규가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4 10분경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궁정동 행사에 올 것을 통보 받았고 430분경에는 비서실장 김계원도 통보를 받는다.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공식 행사

 

김재규는 궁정동에 먼저 도착한 후 안전가옥 집무실에서 오후 4 40육군참모총장육군대장 정승화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시국 얘기를 나누자며 그를 안가로 초대한 뒤, 중정 제2차장보 김정섭도 저녁 6 30분까지 궁정동 안가로 오도록 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했다.

 

오후 5 20,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이 안가에 도착했다. 김재규는 김계원과 안가 앞마당에서 부마항쟁 때 부산에서 직접 확인한 민심을 얘기하였고 당시 상황을 호도하고 있는 차지철을 심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차지철 이 자식 오늘 해치워 버릴까요?" 라는 등 격한 반응도 보였다. 평소 김재규를 친동생처럼 아끼던 김계원은 내일 민정수석의 대통령 보고 때 차지철의 월권에 대해 각하께 보고하도록 하겠다면서 김재규를 달랬다.

 

준공식을 마치고 오후 6시쯤 궁정동 안가에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일행이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재규와 김계원은 안가의 동 연회장에 안내하면서 만찬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도 초대되었다.

연회에서는 당시 부마사태와 김영삼에 대한 처리문제를 두고 논쟁이 오고 갔으며 박정희는 김재규를 많이 질책했고 차지철은 이를 거들었다. 이런 살벌한 상황에서 김계원은 이야기 주제를 돌려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10 27일 새벽 5시의 궁정동 안가 현장

 

이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오자 마자 전화로 들어오라고 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김정섭이 있는 ''동으로 들어가 저녁 7 10분경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집무실 책장에 숨겨놓은 자신의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이던 의전과장 박선호(김재규가 체육교사를 하던 시절 김재규의 제자)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김재규의 6사단장 재임 당시 전속부관)을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어 사태에 따른 명령을 내렸다.

 

7 38분 다시 연회로 돌아왔을 때는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고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7 41분 김재규가 발터 PPK를 꺼내 쏘아 차지철의 오른 손목을 맞혔고 이어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쏘았다. 박정희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뒤이어 차지철에게 제3발을 쏘려 했으나 발터 PPK가 격발 불량을 일으켜 발사되지 않자 차지철은 밖으로 뛰어나가 화장실로 피신했다.

 

김재규의 제 1발을 신호로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은 주방에서 식사 중이던 김용태 경호실 운행계장과 김용섭 경호관을 사살했다. 같은 시각 경호원 대기실에서 마른 안주를 먹으며 AFKN TV 방송을 보고 있던 정인형과 안재송이 총소리를 듣고 뛰어나가려 하자 박선호가 권총으로 제지하며 "움직이지 마라, 제발 우리 같이 살자!" 라고 애원했지만 안재송이 총을 뽑으려 했고, 어쩔 수 없이 박선호는 안재송을 사살한 데 이어서 친구인 정인형도 살해하고 말았다.

 

밖으로 나온 김재규는 정인형과 안재송을 처치하고 나온 박선호의 리볼버를 넘겨받아 연회장으로 돌아왔고, 화장실에서 나와 경호원을 찾던 차지철은 김재규와 맞닥뜨렸고 김재규는 저항하는 차지철의 복부에 총을 발사하여 치명상을 입혔다. 차지철을 거꾸러뜨린 김재규는 쓰러져 있는 박정희에게 후두부를 향하여, 마지막 탄을 발사해 그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

 

결국 이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과 함께 있었던 정인형 경호처장, 안재송 경호부처장, 김용섭 경호관, 김용태 운전기사 등 6명이 희생됐다.

 


심수봉과 신재순(당시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3), 10.26사건 당일 박정희의 최후 술자리에서 시중을 든 '그 때 그 여인들'이 군사법정에 증인으로 소환됐다. 당시 일류 가수와 여대생 광고모델인 두 여인이 대통령의 비밀연회장에 동석했던 사실이 법정을 통해 공개되면서 절대권력자의 사생활 타락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김정섭과 함께 육군 본부로 갔다. 김계원은 박정희의 시체를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싣고 가서 박정희를 살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김계원은 청와대로 들어와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고, 최규하와 함께 육군 본부로 가서 정승화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만나 거듭 범인은 김재규라고 말했다.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육군 본부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 체포 명령을 내렸고, 10월 27 오전 0 40분경에 김진기가 김재규를 체포하자,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김재규를 인계받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정부는 27일 새벽 전국(제주도 제외)에 계엄을 선포했으며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됐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임명됐다.

10 28일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사건 전말에 대한 수사 보고를 하였고 이로써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시해 사건에 대하여 브리핑하는 인간백정 전두환 소장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11 3일 거행됐다.

 


 

한편 박정희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의 공백기를 잽싸게 파고든 자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그는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내란음모죄 혐의를 씌워 체포하는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최규하를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면서도 육군본부에 갔다는 사실을 약점으로 잡아 허수아비로 만든 이후, 1980 5월의 5.17 내란과 그 다음날부터 벌어진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을 거치면서 결국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 권력의 꼭짓점에 서는 데 성공하며 또 다른 군사정권이 집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12.12 사태육군참모총장직에서 박탈됨과 동시에 육군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고문을 받았다. 그는 국방부 군법회의 재판에서 내란방조미수죄로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80 6월 10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며, 1981 3월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특사로 사면, 복권되었다가 1988년 군적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10.26 사태의 책임자들은 1980 5 20일 대법원의 시해사건 상고심 판결에서 김재규와 중앙정보부원 4명에게 각각 사형을 확정하고 김계원은 무기선고를 내렸다. 국내외에서 김재규의 구명 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지만 김재규, 박선호, 유성옥, 이기주, 김태원은 5 24일 처형됐다.

 

 



저의 10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 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 김재규 중앙정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