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29일

반도호텔에서 국내 첫 패션쇼

산풀내음 2016. 10. 10. 20:10

195610 29,

반도호텔에서 국내 첫 패션쇼

 

1956 10 29, 노라노(본명 노명자)가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쇼를 서울 반도호텔(현 롯데호텔)에서 열었다. 물들인 미군복이 최고의 생활복으로 팔리던 때에 여류 소설가 김말봉이 사회를 보고, 단골 손님들이 주 모델이었지만 영화배우 최은희, 조미령도 모델로 등장해 당시로서는 최고의 이벤트였다.

 

노명자씨

당시 반도호텔

 

노라노는 당시 고가인 옷감을 직물공장을 설득해 싼값으로 구입하고 단골 손님들을 설득하였다. "출품된 옷을 싼값에 제공하겠으니 모델로 서달라"고 요청을 하자 여유가 있던 단골손님 10명이 쾌히 모델로 자원하였다. 10일 정도 워킹 연습을 하고 모델로 출연을 하도록 하였다. 의상은 모델 1인당 6벌이었으니 총 60벌이었다. 출연한 모델 중 한 명은 생전 처음 출연이라 긴장한 나머지 워킹 중 넘어질 뻔한 일도 있었고 아직 양장에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모델들이 뒷 단추 옷이나 스커트의 앞뒤를 바꿔 입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1956 10 29, 한국 최초의 패션쇼

 

유복한 가장에서 태어난 노명자는 17살의 나이에 일본군 대위와 결혼했고 얼마 후 이혼했다. 194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 프랭크 웨건 테크니컬 걸리지에서 디자인을 배운 제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이 날 출품된 옷도 고려모직이 국내 최초로 생산한 모직을 소재로 노라노가 만들었다.

 

1952, 서울이 수복되자마자 퇴계로에 있던 건물 2층에노라노의 집을 열었다.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숍이었다. 당시 대중문화로 가장 크게 유행했던 것이 바로 연극. 최고 인기 극단이었던신협이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올렸고, 모든 무대의상을 노라노의 이름으로 도맡았다. 일종의 전속 디자이너였던 셈이다. ‘은장도라는 사극을 통해 한복의 현대화를 처음 시도한 것도 그녀였다. 이를 본 국악단의 연락으로 국악 의상까지 맡게 됐다. , 연극, 무용, 국악단으로 이어진 무대 의상은 급기야 1955년 당대 톱스타였던 최은희가 주연했던 영화의 의상을 맡으며 영화계로 이어졌다.

 

1960년대에 접어들자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쟁의 상흔이 잊히는 대신, TV로 상징되는 대중문화가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 지금이야 당연하지만, 당시만 해도 양장은 맞춤복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사이즈별로 대량 생산해 입어보고 사는기성복의 개념은 아예 전무한 시절이었다.

 

직장 여성들에게 더 싸고 좋은 옷을 입히자 결심했어요. 그때 캐치프레이즈가마음대로 입어보고 골라 사는 옷이었죠. 지금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그땐기성복 실험이 성공할 수 있을까를 두고도 말이 많았어요. 1963년 미우만 백화점(현 롯데백화점 자리)에 기성복 코너를 처음 열고, 백화점에서 첫 기성복 패션쇼도 열었죠.”

 

1956년 반도호텔 옥상에서 자기 손으로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연 지 7년 만에 또 하나의 패션사를 쓴 것이다.

 

노라노에서 시작한 한국 패션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64년 미국 하와이아라모아나 빌딩에 한국의 패션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쇼룸을 열었다. 이듬해에는 역시 한국 최초로 해외(하와이) 패션쇼를 열었다. 디자이너 노라노의원조한류는 이후로도 착착 진행됐다.

 

1971년부터 1973년까지는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참가했다. 그녀의 디자인을 눈여겨본 미국 뉴욕의 삭스피프스애비뉴(Sacks Fifth Avenue) 백화점에서 350벌의 옷을 주문했다. 패션의 심장부에 첫발을 디딘 역사적 순간이었다. 첫 경험을 바탕으로 1974년에는 뉴욕 플라자 호텔의 견직물 바이어 패션쇼에 참가했다. 1978년엔 뉴욕 7번가에 정식으로 쇼룸을 열었다. 이듬해에는 미국 최고의 백화점 중 하나인 메이시스(Macy’s) 백화점 1층의 15개 쇼윈도 전체를 노라노 컬렉션으로 장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