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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작가 파스테르나크 노벨문학상 거부

산풀내음 2016. 10. 10. 20:22

195810 29,

러시아 작가 파스테르나크 노벨문학상 거부

 

1958 10 29, 스웨덴 한림원에 전보 한 통이 날아들었다. 일주일 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된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Boris Pasternak, 1890 2월 10 ~ 1960 5월 30)가 보낸 전보였다. ‘수상(受賞)을 거부합니다.’ 노벨상 창설 이래 처음 일어난 수상 거부에 한림원도 당혹스러웠지만 무엇보다 작가 자신의 심경은 절망적이었다.

 


Pasternak with family

Pasternak (second from left) in 1924, with friends including Lilya Brik, Sergei Eisenstein (third from left) and Vladimir Mayakovsky (centre)

 

1934년 소비에트 작가동맹이 결성되고 창작에서도 사회주의 원칙이 선언되자 파스테르나크는 긴 침묵에 들어갔다. 이런 가운데 1946년 당시 56세였던 파스테르나크는 문학지 편집장이었던 올가 이빈스카야(Olga Ivinskaya, 1912-1995)를 한 문학행사장에서 만났고, 두 사람은 22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Pasternak with Olga and Irina

 

파스테르나크는 당시 57세로 자식과 부인이 있는 유부남이었고, 올가 이빈스카야는 딸이 있는 미망인으로서 두 사람의 사랑은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불륜이라는 세간의 비난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그 후 파스테르나크와 올가는 세간의 손가락질을 피해서 두 사람만의 허니문을 마련해서 은둔하게 되는데, 1948년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페레델키노에 별장을 짓고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게 된다.

 

이 시기에 파스테르나크는 자신과 올가와의 사랑을 모티브로 해서 새로운 장편소설의 집필을 시작했다. 그때 집필을 시작했던 소설이 바로 유명한 ‘닥터 지바고’였으며 ‘닥터 지바고’의 여주인공 나나는 바로 파스테르나크의 연인인 올가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다.

그 당시 파스테르나크는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책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새롭게 그에게 사랑을 일깨워주었던 올가는 그가 ‘닥터 지바고’를 쓸 수 있게 해주었던 문학적 모티브를 가져다 주었으며, 그의 소설에서 아름다운 여주인공의 모델적 소재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한편 1949년 올가는 서방의 스파이라는 명목으로 소련 경찰에 체포되었고 구속되었다. 파스테르나크의 당시 집필 중인 소설 ‘닥터 지바고’에는 반혁명적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이 들어있다고 판단했던 소련 공안경찰은, 파스테르나크의 세계적인 지명도를 감안해서 그를 체포하는 대신에 그의 연인 올가를 체포해서 처벌했던 것이다.

파스테르나크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감옥에 수감된 올가는 결국 차디찬 감옥생활에서 아이를 유산으로 잃고 말았고 그리고 고통스러운 4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스탈린이 사망했던 1953년도에 간신히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감했다.

 

올가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파스테르나크의 곁으로 돌아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또 다른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파스테르나크는 암 투병 중이었고 올가는 정성을 다해 그를 돌봐 주었고 그녀의 헌신적인 도움 덕에 집필을 시작한지 8년이 지난 1956년에 닥터 지바고를 탈고하였다.

 

그러나, 소련 정부 당국의 사전검열에 걸려 출간이 금지되어 버렸다. 그래서 파스테르나크는 이듬해 11월 소설을 이탈리아에서 출판했다. 소설은 1년 만에 세계 18개국에서 번역되었고 그는 소련 작가로는 두 번째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 곧 ‘매국노’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작가동맹이 그를 제명하는 등 수난의 연속이었다. “국외로 추방하라”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파스테르나크의 수상 거부는 추방을 피하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흐루시초프에게 탄원서를 보내 결국 추방만은 면했지만 이때 받은 상처는 그의 죽음을 재촉했다. 이후 1년 반 만인 1960 5 30일 그는 눈을 감았다.

 

파스테르나크 사망 3개월 후, 올가는 다시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4년 만에 출소했다. 사랑으로 두 번씩이나 감옥생활을 한 비운의 여자 올가는 이후 홀로 외롭게 살다가 1995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1997년 소련의 주요일간지인 모스코프스키 콤소몰렛지에 올가가 사실은 스탈린의 지시를 받는 스파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모스크바의 문학박물관의 직원인 나탈리아 볼코바가 몇 가지 근거를 들어서 올가가 KGB스파이라는 사실을 폭로했다.

나탈리아 볼코바는 올가가 두 번째로 투옥되었던 1961년도에 강제수용소에서 공산당서기장인 흐루시초프에게 보냈던 편지를 근거로 들면서 그녀가 스파이역할을 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19613월 올가는 강제수용소에 수감 중 흐루시초프에게 보낸 서신에서 제발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저는 KGB요원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수용소에서 석방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라는 내용이 적혀있었으며, 그녀는 이 편지에서 자신은 스탈린서기장의 지시에 따라서, 파스테르나크를 감시하기 위해서 그의 거짓된 연인으로 가장해서 살아왔었다고 실토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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