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2일

울진-삼척에 무장공비 1백여 명 침투문장의 구성

산풀내음 2016. 10. 11. 21:01

196811 2,

울진-삼척에 무장공비 1백여 명 침투

 

1968 11 2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예하의 124군 부대 소속의 무장공비가 경북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했다. 이는 지난 1 21일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서울로 침투한 무장간첩 30여명이 경찰과의 교전 끝에 대부분 사살되어 실패로 끝난 1.21 청와대기습사태(소위 김신조 사건)를 만회하고 남한에서 반정부 민중봉기를 일으킬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김일성은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 이후의 사회 혼란기에 공산 혁명을 일으키지 못한 것은 전위적 집단 공산당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마오쩌둥 전술을 응용, 도시 주변 농촌에 지하조직을 확보하고 도시를 포위하는 전국적 체계를 갖추려 노력했다. 이에 따라 1965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전국 각지에 무장간첩이 출몰하였다.

한편 박정희 정권은 1.21사태 이후 3 29일에 220만여 명의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고 신무기 도입의 일환으로 연말에는 구식 소총 M1을 신식 M16으로 교체했다.

 

북한의 무장공비들은 1030일에서 11 2일에 이르는 사흘 사이에 15명씩 8개조로 나뉘어 총120명이 야음을 타고 경상북도 울진군 고포해안에 상륙, 울진, 삼척, 봉화, 명주, 정선 등지로 침투했다. 기관단총과 수류탄을 지닌 무장공비들은 주민들을 집합시킨 다음 북한책자를 나누어 주면서 북한 발전상을 선전하는 한편, 정치사상교육을 시키면서 ‘인민유격대’에 가입할 것을 강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11 3 새벽 울진 북면 고수동 주민이 울진경찰서에 무장공비 출현을 신고하였다. 내용인 이날 아침 무장공비 30여명이 산간마을인 고수동에 나타나 주민들을 강제로 집결시켜 놓고 북한을 찬양하는가 하는, 이에 반항하는 주민들을 칼로 찌르고 돌로 쳐서 죽였다는 것이다. 신고할 경우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노동당, 여성동맹 등에 가입하도록 총검으로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주민들의 결사적인 신고에 힘입어 상황을 파악한 당국은 113일 오후 230분을 기하여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대간첩 대책본부의 지휘 아래 군과 향토예비군을 출동시켜 소탕작전을 벌였다. 12 28일까지 계속된 소탕작전으로 침투한 무장공비 7명이 생포되고 113명이 사살되었으며, 남한측도 민간인을 포함하여 40명이 넘게 사망하고 30명이 넘게 부상하는 피해를 입었다.

 


한편 당시 무장공비들의 만행이 잇따랐는데, 삼척군 하장면의 한 산간마을에서는 80세 노인, 52세의 며느리, 15세의 손자 등 일가 세 사람이 난자 당했으며, 평창군 산간마을에서는 10세의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절규하다가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무장공비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이승복 일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