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11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미국 방문에 올라

산풀내음 2016. 10. 14. 22:31

1961 11 11,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미국 방문에 올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1961 11 11일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25일까지 15일간의 방미 장도에 올랐다. 당시는 전용기도 없고 가난한 나라였기에 외국 민항기와 미군 수송기를 빌려 타고 4번이나 중간기착을 한 뒤 사흘 만에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미국 케네디 대통령을 방문하는 길에 도쿄에 들러 일본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와 만난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정래혁 상공부장관 일행은 도쿄에서 차관 도입 교섭을 위해 서독으로 향발한다.

 

1961 11월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정일영씨의 통역으로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와 회담하고 있다

 

박정희-이케다 회담에서 박정희의 목적은 조속한 한일회담 재개와 경제협력 유인에 있었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지지부진하게 십여 년째 끌어오던 한일회담에 큰 활력이 투입된 것은 장면 정권의 말기(1961년 봄날)였다. 그때 양국 간 물밑 교섭의 수준은 이른바 식민지배상금(대일청구권자금)의 규모에 대한 구체적 수치까지 오가는 정도였다. 그러나 516이 그것을 유야무야 시켰다.

 

역사적인 한일정상회담이 열린 11 12, 그날 저녁에는 박정희의 초청 형식으로 영빈관에서 만찬이 열렸다. 이케다 총리, 고사카 외상을 비롯한 일본의 정재계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만찬 후에 박정희는 재일동포 50명과 만났다. 두 자리에는 박태준도 함께 있었다. 날이 밝으면 행선지가 갈라지게 된다. 박정희와 그의 수행원들은 미국으로, 정래혁 상공부장관과 그의 일행은 서독으로

 

박의장은 11 13일 오후 워싱턴공항에 도착, 미국은 박정희에게 우호적(friendly)이었다. 하지만 이상은 아니었다. 박정희의 워싱턴 방문은 상징성에서는 성공 실질적 성취에서는 실망이다. 박정희를 맞이하기 위해 부통령 린든 존슨이 공항에 나왔다. 백악관에서 차례나 케네디와 만났다.

 

1961 11월 백악관을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 부부를 만난 박정희 의장./케네디 대통령 기념도서관

 

박 의장과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11 14일 정오 오찬을 겸한 대담에 이어 오후에 본격 회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박 의장은 8·12성명에서 발표한 대로 1963년 여름까지는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공약했다. 미국은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모든 가능한 경제원조와 협력을 계속 제공할 것을 확약했고 공산주의의 팽창에 대처하는 공동 이익을 인정하여 군사원조를 제공할 것도 재확인했다" 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외형적 환대 추상적 지원 약속을 위해 워싱턴으로 달려간 것이 아니란 점이다. 그는 아주 구체적인 지도자였다.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24억 달러가 들어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한 지원과 60만 한국군의 감축 논의를 종식하고 전력증강을 위한 지원을 하겠다는 글자 그대로 '확약'을 받고 싶었다. 박정희는 확신했다. 이 지원은 한국을 위한 미국의 은혜가 아니라 미국 자신을 위한 장기적 투자이다. 박정희의 비전을 미국이 어느 정도 수용했나를 따져야 한다.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준 선물은 있다. 혁명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하고 한국에 대해 계속 지원할 것은 확실히 했다. 하지만 이것을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안겨준 특별한 선물이라 말할 수 없다. 5.16은 이미 기정사실이고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지도자였다. 케네디가 혁명정부에 대해 의구심을 버리지 않았다 해서 원조를 중단하거나 규모를 갑자기 줄일 가능성은 없었다. LA타임스의 표현이 정확하다.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투자를 했다.

박 의장은 프레스클럽에서 연설과 기자회견을 한 후 맥아더 원수와 벤플리트 장군을 만나고 하와이를 거쳐 11 25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한편 정래혁 상공부장관의 서독 차관 도입은 독일 출생 유태인인 아이젠버그의 주선으로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이젠버그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 지사를 두고 수입품 중계를 통해 돈을 번 사업가였다. 서독 정부는 장기차관과 민간투자를 합쳐 1962년에 3750만 달러(그 해 한국의 수출 총량에 육박하는 금액) 상당의 마르크화를 한국정부에 제공하기로 했다. 이것은 박정희 정권이 도입한 최초 공공차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