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20일

장지연,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게재

산풀내음 2016. 10. 18. 20:27

1905 11 20,

장지연,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게재

 

당시 일본천황의 특사로 서울에 파견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은 우리 나라의 신성한 자주권을 강탈하는 강도적인 요구를 교묘한 방법으로 고종황제에게 제기하였으나 단호히 거부되자 파렴치하게도 이미 매수한 외부대신 박제순을 비롯한 매국역적 5놈을 강박하여 문에 도장을 찍게 하고 일방적으로 을 선포하였다.

당시 장지연은 이 소식을 듣고 하늘과 땅이 꺼지는듯한 억울함과 격분, 적개심으로 분노했다. 성한 몸으로는 도저히 감수할 수 없어 그는 술을 한껏 마시고 통탄했다.

 

그리고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3일이 지난 1905 11 20, 위암 장지연(張志淵, 1864 11월 30 ~ 1921 10월 2)이 쓴 을사조약을 통렬히 비판하는 명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황성신문에 실렸다.


 

『지난 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하게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하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 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 4천 년의 강토와 5백 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고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 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라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여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 원통한지고, !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장지연이 주필 겸 사장으로 있는 황성신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비난하고 ‘을사5적’을 개, 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힐책한 논설을 널리 알리기 위해 평소 발행부수 3000부보다 훨씬 더 많은 1만부를 일제의 소위 경무청의 사전 겸열을 거치지 않고 새벽 5시 전에 서울과 전국각지에 배포했다.

이날 새벽, 일본 경찰이 한양골 신문사를 급습했을 때 장지연은 술을 마시며 그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일본은 사전검열을 받지 않고 신문을 배포했다는 것을 이유로 장지연을 체포했고 신문은 80여일 동안 정간 처분했으며 인쇄기 등을 차압했다.

 

 을사 5

 

64일간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장지연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08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가 이듬해 귀국, 1909 10월 경남 진주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신문 경남일보를 창간하고 초대 주필로 언론인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한일합병 후인 1910 10 11일자 경남일보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 순국한 황현의 ‘절명시(絶命詩)’를 실어 경남일보마저 정간 조치 당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신문은 10일 만에 복간됐고 장지연은 그대로 주필 자리에 있었다. 이후 경남일보의 논조는 친일로 급변했고 장지연 역시 점차 친일의 모습을 보여 1913년 경남일보를 떠나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한 매일신보에 친일논조의 기명기사를 올리기도 했다.

 

191518년 총독부 기관지인매일신보에 기고한 친일논조의 글을 살펴보면, 그는 총독부가한일병합을 기념해 개최한 물산공진회에 대해조선총독부가 혁구쇄신하여 쓸모 없는 것을 없애고 농공실업을 장려해 진보한 성적을 모두 수집하여 진열한 것”(조선풍속의 변천)이라고 찬사를 보내고, 일본을동양의 패왕”(만록-지리관계)이라며 치켜세웠다. 또 순종이 일본을 방문하자내선(內鮮) 인민이 친목으로 사귀어 장애를 풀어 없애고 일체 간격이 없으니일선(日鮮)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봉송 이왕전하 동상)라며 침략을 미화했고, 하세가와 총독을 환영하기 위해 지은 한시인환영 하세가와 총독에서한수의 풍연이 원래 낯이 익으니 매화도 예전처럼 기뻐 웃는 듯이라고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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