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20일

남산 외인아파트 철거

산풀내음 2016. 10. 18. 20:37

1994 11 20,

남산 외인아파트 철거

 

서울시가 1994 11 20일 오후 3시 남산의 남쪽 허리를 가로막고 있던 외인아파트를 15억 원을 들여 폭파 해체했다. ‘꽝’하는 굉음과 함께 A동이 좌우 양측에서부터 중앙부로,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15초 만에 연달아 무너졌고, 이어 3분쯤 후 옆에 있는 B동도 똑같은 과정으로 쓰러지면서 1972년 건축돼 22년 동안 남산을 가로막고 있던 외인아파트는 과거의 기억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하얏트호텔 주변 등 한남동 일대에 몰려나와 해체과정을 지켜본 수만 명의 시민들은 아파트가 예고된 대로 좌우 끝에서부터 무너지는 순간, 환호와 함께 탄성을 터뜨리며 모처럼만에 시원함과 뿌듯함을 만끽했다.

 

 

1960년대 선진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우리 정부와 기업이 초청한 외국인들의 거주시설이 필요했다. 이들을 위한 음식과 옷은 수입을 통해 조달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살 집이었다. 짧게 머무는 외국인 사업가들은 시내의 조선호텔과 도뀨호텔, 코리아나호텔에서 묵었지만 장기 체류하는 대사관 직원과 상사 주재원들은 호텔에서 머무는 것보다 전용주택을 따로 짓는 것이 더 나았다.


그리하여 정부는 외국인 전용 공동주택을 건설했고 그 첫 번째가 1967 11층 규모로 지어진 용산구 한남동의 힐탑아파트였다. 엘리베이터가 처음 등장했고 밖으로 뛰어가지 않고 집에서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자동식 전화가 놓였다. 당시 귀했던 스프캔과 감자칩, 스파게티면도 힐탑아파트 내 외국인 전용매점에서 살 수 있었다.

 

한남동 힐탑아파트

 

힐탑아파트만으로는 몰려드는 외국인과 미 8군 수요를 맞추기에 부족했던 정부는 본격적으로 외인아파트 공급에 나선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1970년 착공해 1972년 완공한 남산외인아파트였다. 당시 용산구에 속한 남산 허리께 한남공원 용지 일부를 해제해 외인아파트를 지은 것이다. 주택공사가 고도 1m의 남산 비탈에 외인아파트를 세우기로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주공 총재는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서울로 들어오면 곧바로 보이는 남산에 고층아파트를 지어 주공아파트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남산 외인아파트에 이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인근에 하얏트호텔도 들어섰다.

 

남산 외인아파트

 

그러나 주공의 기대와 달리 70년 경부고속도로 전구간이 개통된 뒤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서울로 들어오는 승객의 눈에 남산의 조망을 해치는 외인아파트가 보이면서 "왜 굳이 저 자리에 외인아파트를 지었느냐"는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후 많은 서울 시민이 남산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 남산에는 아파트. 호텔. 극장 등 경관을 해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시설이 더 이상 들어서지 못했다.

 

1988 12월 고건 시장이 임명됐다. 그리고 1990년 고건 시장의 주창에 따라 남산 제 모습 찾기 운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고건 시장은 수서 사건으로 인해 그 해 겨울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후임 시장에 의해 남산 제 모습 찾기는 계속되었고 운동의 핵심은 외인아파트 철거와 국가안전기획부 및 수도방위사령부 이전이었다.

 

수방사가 1991 3월 경기도 과천시와 서울시의 경계인 남태령으로 이전하면서 남산 제 모습 찾기 운동은 본격화되었다. 이전한 자리에는 그 주변 시유지를 합쳐 약 25천 평에 조선시대 남산골 모습을 재현한 남산한옥마을이 조성됐다. 최대한 원래 지형(地形)을 복원해 전통정원을 꾸미고, 중요민속자료이면서도 관리가 소홀했던 전통한옥을 집단 이주시켰다.

 

외인아파트 철거는 보상비가 문제였다. 1972 11월 준공된 외인아파트는 16, 17층짜리 아파트 각 한 개 동과 아파트 서쪽의 외국인 단독주택 50개 동으로 이뤄졌으며, 부지는 모두 31천 평에 달했다. 외인아파트 건립에는 땅값, 건축비 등 모두 40억 원이 들었다. 지은 지 20년 가까이 흐른 시점에서 철거 보상비로 1,535억 원이 책정됐다. 보상금을 너무 많이 준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1994년 말 이주가 마무리됐고, 50개 동의 단독주택은 포클레인 등 중장비를 동원한 재래식 방법으로 철거됐으며, 두 개 동의 아파트는 폭파됐다.

 

남산 제 모습 찾기의 또 하나가 중앙정보부였다. 안기부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있던 남산은 '공포 지대'로 악명 높았다. "남산에 끌려갔대", "남산에서 그렇게 정했대"라는 식으로 한동안 '남산'은 중앙정보부를 지칭했다. 그러나 중정의 남산청사가 남산에 있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정확한 위치와 모습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서울시는 1980년대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을 바꾼 중앙정보부 부지 24천 평과 건물 41개 동에 대한 보상비로 7백억 원을 주기로 안기부 측과 1991년 말 계약한 뒤 5년 만에 완전히 인수했다. 그 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으로 쓰이던 안기부의 본관은 현재 서울시 종합방재센터가 들어서 있고, 나머지 건물은 교통방송국 등이 입주해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남산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정리해야 할 건물들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