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30일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민영환 자결

산풀내음 2016. 10. 20. 21:02

1905 11 30,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민영환 자결

 

1905 11 17일 을사조약으로 조선이 허울뿐인 나라가 되자, 충정공 민영환 선생이 11 30일 오전 6시 을사조약에 항거하며 이완식의 집에서 이천만 동포’, ‘외국사절’, 그리고 황제에게 각각 유서를 남기고 45세의 나이로 스스로 할복 자결했다.

 

 

『아! 우리 나라 우리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까지 다다랐구나. 생존경쟁(生存競爭)이 심한 이 세상에 우리 민족의 운명이 어찌될 것인가?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죽고, 죽기를 맹세하는 사람은 살아나갈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나 영환(泳煥)은 한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을 갚고, 우리 2천만 동포에게 사()하려 한다. 영환은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황천(黃泉)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여, 2천만 배나 분려(奮勵)를 더하여 사기(士氣)를 굳게 가지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을 합하고 힘을 아울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할지어다.

그러면,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겠다. ! 조금이라도 실망하지 말라.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마지막으로 고()한다.

 

민영환 유서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그가 자결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자, 많은 국민들이 애통해 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일부 사람들은 뒤따라 자결하기도 했다. 그리고 민영환이 자결한 8개월 뒤인 어느 날 그의 피가 묻은 옷과 칼을 보관해 둔 마루에서 푸른 대나무가 솟아올랐다.

이 사실은 1906 7 5일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보도되었고, 민영환의 피를 먹고 자란 대나무라하여 혈죽(血竹)이라 부르고 그의 의기를 높이 칭송했다.

사람들은 민영환의 충정이 또다시 기적을 일으켰다고 생각했고, 일본은 민심의 동요를 잠재우기 위해 대나무를 뽑아 버렸다.  그러나 이를 유가족이 몰래 간직하다가 해방 이후 그 진실을 세상에 공개했다.

 

민영환의 혈죽

 

민영환(閔泳煥, 1861 8월 7 ~ 1905 11월 30) 1861년 서울에서 병조 판서 민겸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17세의 나이로 정시 문과에 급제한 뒤 예조·병조판서, 한성부윤 등을 거쳐 1895년 미국주재 전권대사에 임명됐다.

 

해외견문을 넓히고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즉시 제도 개혁과 민권 신장에 앞장섰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자괴감에 빠졌지만 광무황제의 신임으로 참정 대신, 탁지부 대신에 임명된 선생은 1904 2월 한일의정서 체결과 1904 8월 제1차 한일협약 등 일제가 자행한 침략행위에 대해 격렬히 저항했다. 이어 1905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에 서명한 이완용 등 5적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경에 체포돼 평리원 감옥에 수감됐다.

 

하지만 민비를 고모로 둔 그는 권력의 단맛을 충분히 맛본 권력의 실세였다. 1890년대에 그는 민영준, 민영달, 민영소와 함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당시 정계를 쥐락펴락한 민씨 4인방 중 한 명이었다.

 

갑신정변 이후 열강 사이에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 바깥에서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던 이른바태평십년(1885~1894)’이 찾아왔었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이때 민씨 척족의 부패는 동학 농민봉기로 곪아 터졌다. 동도대장 전봉준은 민영환을관직과 작위를 팔아먹는 것을 일삼던 자로 손가락질한다. 그는 명실상부한 민씨 척족정권의 실세로 왕조의 몰락을 이끈 책임을 면키 어려운 인물이기도 하다.

 

민영환의 국장에 모여든 백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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