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30일

북한, 화폐 개혁 단행

산풀내음 2016. 10. 20. 21:10

2009 11 30,

북한, 화폐 개혁 단행

 

북한은 2009 11 30일에 제6차 화폐개혁을 감행한다. 이 역시 기존의 화폐와 새 돈을 ‘100 1’로 강제 교환시켰다. 특히 교환 가능 액을 세대 당 10만원으로 제한하는 상한액을 둠으로써 장마당(시장)이 본격화된 상황에서 시장의 자본 대부분이 국가로 회수되게 된다.

인민들이 장마당에서 유통시키고 있던 지하 자금을 회수하는 목적 외에도 지나치게 상승하는 물가를 잡고 계획 경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김정일이 ‘7.1경제관리개선’ 조치(2002)를 통해 임금과 물가의 현실화를 꾀했던 것이 오히려 급격한 화폐 가치 하락과 이로 인한 물가 상승을 야기했던 것이다.

 

 

특히 2009년의 화폐 개혁 진행 과정은 우왕좌왕한 측면도 있었다. 화폐 개혁 당일인 1130일에는 세대 당 교환 가능 액을 10만원으로 한정했다가, 12 1일에는 한도 초과 시 1/1000 비율로 저금하도록 유도했는가 하면, 12 3일에는 가족 1명당 5만원 추가 교환을 허용하는 등 추가 기대를 조장하는 부작용을 키웠다.

 

결국 1228일 북한은 외화 사용을 전면 금지시키고 장마당을 전면 폐쇄하게 된다. 원래 김정일은 후계 체제 확립을 도모하려는 의도에서 화폐 개혁을 시도했었다. , 인민들의 장롱 화폐를 끌어내 경공업에 투자함으로써 내수 경제를 살려 민심을 안정시킨 후 그 공적을 김정은에게 돌리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새 돈의 가치와 물가, 환율이 신속히 정해지지 않아 시장 가격과 국정 가격에 차이가 벌어졌고, 이로 인해 새 화폐에 대한 신뢰성이 사라지자 현금화가 쉬운 쌀이나 현물에 대한 사재기가 일어났으며, 물가는 단기간에 10~100배 가까이 뛰는 등 큰 혼란이 일어났다. 소위 상식을 초월하는 미친 물가 상승인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의 모습

 

또한 교환한도를 두고 나머지는 저축을 유도하였는데 북한에서 은행에 돈을 넣어둔다는 것은 사실상 빼앗기는 것이라고 인식되었기에 교환되지 않는 나머지 돈들은 그냥 휴지조각이 되어 버려서 돈을 그냥 불태워 버리거나 강물에 뿌려버리고 자살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였다.

 

중국과의 국경 무역도 불안정해지고 밀거래까지 중단되자 김정일은 화폐 개혁 실패를 박남기 계획재정부장에게 뒤집어씌워 숙청시켜 버렸다. 체제 개혁이 우선되지 않은 화폐 개혁은 아무리 핵무기를 보유한다 해도 북한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고 스스로의 함정에 빠져 몰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북한은 지난 70년 동안 모두 6차례에 걸쳐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일본 돈을 11 비율로 북한 돈인 ‘조선중앙은행권’으로 바꾸는 작업인 처음 두 차례의 화폐 개혁(1947, 1949)을 제외한 이후 네 차례의 화폐 개혁은 북한 당국의 ‘공권력 남용’으로 북한 경제에 큰 상처만 남겼다.

 

10년 뒤인 1959년에 제3차 화폐 개혁이 단행되는데, 한국 전쟁 기간에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해 마구잡이로 찍어낸 돈이 문제였다. 시중에 화폐가 넘쳐나면서 물가가 급격히 상승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한 조치로 구 화폐와 신 화폐의 교환 비율을 ‘100 1’로 강제하는 방식의 화폐 개혁이 단행됐다.

그로부터 20년 뒤인 1979년에 단행된 제4차 화폐 개혁은 ‘자력갱생’ 방식으로 진행됐다. 북한은 1973년 ‘오일 쇼크로 시중 통화량이 급감하자 시장(인민)의 자본을 국가가 일시에 회수하는 손쉬운 방법을 채택했다. 이는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인민의 자본을 축적시켰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1992년에 시행된 제5차 화폐 개혁은 체제 유지를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유럽의 자유화와 소련의 붕괴로 인해 당시 이들 국가들로부터 물물교환으로 필요 자원을 조달해 왔던 북한은 갑자기 국제 무역을 위한 외화가 부족해지게 됐다. 배급이 중단되고 시장 가격이 폭등하자 역시 가장 손쉬운 방법을 채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