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4일

독립신문 4년 만에 폐간

산풀내음 2016. 10. 25. 22:50

189912 4,

독립신문 4년 만에 폐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며 한국역사상 최초로 인쇄된 한글 전용신문이었던독립신문이 창간 4년만인 1899 12 4일 폐간됐다. 독립신문은 한글전용으로 민중을 위해 알기 쉬운 신문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국 신문사상 획기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중의 계몽을 위해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한 시대의 기념비적인 신문으로 평가 받고 있다.

 

 

독립신문은 정부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과 개화파가 합작하여 1896 4 7일 창간, 처음에는 가로 22cm, 세로 33cm의 국배판 정도 크기로 4면이 발행됐다. 1면 머리에는논설을 싣고, 이어서관보’, ‘외국통신’, ‘잡보의 순으로 1면에서 2면으로 넘어가면서 기사를 배치한 뒤에 3면에는 광고를 실었다. 광고는 영문과 한글 2종류였다. 4면은 영문판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로 편집됐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7 1월부터는 한글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두 개의 신문으로 발행했다.

 

독립신문은 19세기 말 한국사회의 시대상을 담아내고 민중계몽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민간신문이었으나 정부의 탄압과 수구세력의 미움을 사게 되고 핵심인물이 바뀌는 등 혼란을 겪었다. 결국 이날 정부가 서재필에게 4천원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독립신문의 판권과 인쇄시설을 매수했고 이날부터 독립신문은 더 이상 발행되지 않았다. 언론계는 1957년 독립신문 창간일인 4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의 탄생을 기념하고 신문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로 삼고 있다.

 

신문을 창간한 송재 서재필(松齋 徐載弼·18641951)은 폐간 후 바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15년 전, 혁명(갑신정변)의 실패로 미국으로 도망가야 했던 그가 다시 쫓기다시피 간 것이다. 두 번째 망명길에 오른 그의 머릿속은 온갖 상념으로 가득했다.

자신의 행위 때문에 부모, , 아내가 음독자살하고 동생이 참형되고 두 살배기 아들은 굶어 죽었다. 그는 미국에서 이런 비통한 소식을 전해 들으며 막노동으로 고등학교와 의대를 졸업했다. 그 사이 갑오개혁으로 세상이 바뀌어 국내 인사들이 정부의 고위직을 보장하며 귀국 종용을 하자 ‘권세에는 관심 없으니 신문으로 계몽운동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며 11년 만에 환국했던 그였다. 그러나 4년 만에 꿈을 접고 다시 고국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다시 쫓겨 간 미국 땅에서 의사로 여생을 편히 살 수 있었건만, 그는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진 조국을 버려둘 수 없었다. 문방구, 인쇄업, 의사 일을 전전하며 번 돈을 독립운동에 바쳐 가산을 탕진하고 건강까지 잃었다. 그리고 여든한 살이 되어서야 광복을 맞았다.

 

미 군정장관 하지는 이 노옹(老翁)에게 건국의 일꾼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조국에 마지막으로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48년 만에 귀국하지만 1 4개월 만에 다시 떠나야 했다. 그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경계했던 국내 인사들의 견제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6·25전쟁 중이던 1951년 이국에서 쓸쓸히 죽어 간 그의 유해는 1994년 문민정부에 이르러서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좌로부터 김규식, 서재필, 여운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