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8일

14년 만에 쌀막걸리 제조 허용

산풀내음 2016. 10. 30. 16:11

1977 12 8,

14년 만에 쌀막걸리 제조 허용

 

농수산부가 1977 12월 쌀 수확량을 41706천섬으로 최종집계, 발표했다. 이는 전년보다 15.2%, 평년작에 비해 35.3%가 증가한 양이다. 정부 수립 이후 최대 풍작이었다. 그러나 쌀 재고량이 정부미 680만 섬, 민간보유 550만 섬 등 1,230만 섬에 달해 농촌 쌀값이 정부수매가(80kg 정곡기준 가마당 262백 원) 이하로 떨어져 생산농민의 의욕을 떨어뜨렸다.

이처럼 추곡(秋穀)이 대풍을 이룬 것은 1971년 다수확 신품종인 통일벼가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영농기술이 크게 향상됐기 때문이었다.

 

1974년 이후 연속 대풍으로 쌀을 완전 자급하게 되자 정부는 지금까지의 쌀 소비억제책을 크게 완화, 1월 무미일(無米日)을 철폐하고 12 8일에는 지난 1963년부터 금지해 온 쌀막걸리 생산을 허용했다. 1963년 쌀막걸리 제조가 금지된 이후 막걸리는 쌀소비절약을 위해 밀가루 80, 옥수수 20의 비율로 만들어왔다.

 

1977 12월 막걸리 허용

 

1960~70년대 초 한국은 심각한 쌀부족 현상을 겪었다. 당시 한국은 농업국가였으나 낮은 생산량으로 인해 많은 쌀을 미국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었고, 외화를 절약하고 쌀의 자급자족도를 올리기 위해혼분식 권장을 실시했다. 혼분식 권장은 쌀을 덜 먹고 보리나 잡곡, 밀가루를 많이 먹자는 운동이다. 여기까지는 국민들도 받아들일 만한 캠페인이었으나, 당시 정권은 이에 그치지 않고 점점 더 강력한 절미 운동을 벌였다. 급기야양곡소비제한조치를 내려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쌀을 원료로 하는 식사제공을 금지했으며, 쌀을 원료로 하는 양조와 제과를 금지했다.

 

1960년대 혼분식 장려 캠페인

 

학생들의 도시락은 30% 이상의 잡곡을 함유한 밥이어야 했으며, 수요일과 토요일은 무미일(無米日)로 지정되어 모두 보리밥을 먹거나 밀가루 음식을 먹어야 했다. 이런 검문이 일상화되어 손님에게 쌀밥을 내놨다는 이유로 적발되어 몇 달씩 영업정지를 먹은 음식점들의 명단이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이런 혼분식으로 인해 대표적인 밀가루 음식인 라면은 국민음식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쌀이 들어가는 각종 식품들도 당연히 금지되었다. 과자, 술 등 국민들이 좋아하던 간식거리가 그 대상이었다. 쌀과 찹쌀 등을 원료로 만들어지는 엿 역시 이러한 타격을 정면으로 받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