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21일

광원 123명 서독에 첫 파견

산풀내음 2016. 11. 10. 20:51

1963 12 21,

광원 123명 서독에 첫 파견

 

서독 루르탄광지대에서 일할 우리나라 광부 123명이 1963 12 21일 에어프랑스 전세기편으로 김포공항을 떠났다. 광부들 얼굴에는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했다. 약속한 월급은 162달러50센트(기본급). 1인당 GNP 87달러(62)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1977년까지 8천 여 명의 한국인이 광부가 되어 독일 지하에서 노동을 했고, 이들의 뒤를 이어 1만 여 명의 한국인 간호사가 독일 병원으로 파견되었다.

 


 

1960년대에는 독일 광산의 인력 수요가 컸는데, 독일은 한국 광부들을 통해 인력 부족 현상을 해소시키고자 했다. 이로 인해 이른바 ‘서독 파견 한국 광부 임시 고용계획’이 탄생하게 되었다. 한 차례 문서교환이 이루어진 후 1963127, 16일 협정이 발효되었다. 이 협정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독일이 유럽권 밖의 국가와 체결한 최초의 협정이었던 것이다.

 

양국 간의 이와 같은 합의는 당시 자금이 필요했던 한국의 이해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독일로 파견된 인력들이 한국으로 돈을 송금하는 것도 도움이 되었지만, 이 협정으로 인해 또 다른 커다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당시 약 30%에 육박하던 한국의 높은 실업률을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63년 당시 우리 경제는 실업률이 8.1%에 달하고, 1961년 기준 200명 이상의 종업원을 둔 기업이 54개 밖에 안 돼 변변한 일자리 하나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원파견은 국가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분명 돌파구였다. 중졸 이상의 학력과 20세 이상 30세 미만 그리고 탄광근무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자격조건이었는데, 몰려든 지원자가 2874명이었다. 8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합격한 사람은 367. 대학물을 먹은 사람이 20%나 됐다. 합격자는 20일간의 탄광훈련, 20일간의 독일어강습을 거친 후 다시 서독 현지에서 3개월의 적응훈련을 받아야 했다.

 

힘들게 작업장을 배정받았지만 작업도 간단치 않았다. 지하 1000미터에서 뿜어나오는 30도의 지열과 50킬로그램이나 되는 작업도구로 3년 뒤 고국으로 돌아올 때는 대부분 한번 이상 골절상을 경험했다. 우려했던 탄광사고도 이듬해 11월부터 발생하기 시작, 돌에 깔려 죽거나 탄차에 부딪혀 현장에서 죽는 사고들이 일어났다.

 

독일은 당시 광부뿐만 아니라 간호사도 필요로 했다. 독일의 여러 수도회와 한국 내 독일 가톨릭 교회는 1950년대 말부터 이미 한국 간호사들의 독일 파견을 중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부협정에 상응하는 한국 간호사의 독일 파견에 관한 공식 협정은 1971726일에서야 비로소 체결되었다.

 


 

한국인 광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간호사들 역시 독일에서 크게 인정을 받았다. 이들은 전문적이고 친절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고용계약도 연장되었다. 몇몇 간호사들은 한국인 광부들과 결혼하기도 했고, 한국에 있는 남편을 독일로 불러오기도 했고, 독일인과 결혼하기도 했다. 3년 후에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한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한국 간호사의 절반 이상이 독일에 남았다. 이들은 오늘날 한·독 우호관계의 주축이라 할 수 있다.

 

간호사들과 함께 한국인 광부들은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어내는데 큰 공헌을 했다. 동시에 이들은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어 한국의 발전과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1964 12월 차관을 구하기 위해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인 광원과 1964 11월부터 파견된 간호사를 찾았다.

박대통령 일행이 강당으로 들어가 태극기가 걸린 단상에 오르자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했다. 박대통령이 선창하면서 합창이 시작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차츰 커지던 애국가 소리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목부터 목멘 소리로 변해갔고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에 이르러서는 울음소리가 가사를 대신해 버렸다. 대통령 부부, 300여명의 우리 광부와 50여명의 간호사 모두가 어깨를 들먹였다.

 

밴드의 애국가 연주가 끝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코를 풀더니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 일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받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기 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박대통령은 연설원고를 옆으로 밀쳐버렸다. "광원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결국 대통령은 연설을 마무리짓지 못했다. 본인도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정말 반드시….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되던 박 대통령의 연설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광부, 간호사뿐 아니라 곁에 있던 육영수(陸英修) 여사, 뤼브케 서독 대통령도 손수건을 꺼내 들면서 공회당 안은 ‘눈물바다로 변했다. 박대통령은 참석한 광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파고다 담배 500갑을 전달한 뒤 강당 밖으로 나왔다. 30분 예정으로 들렀던 광산회사에서 박대통령 일행이 강당 밖으로 나오는 데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함보른 광산 회사측에서는 박대통령에게 한국인 광부가 지하 3,000m에서 캐낸 석탄으로 만든 재떨이를 기념으로 선물했다.

 

박대통령과 육여사는 울어서 눈이 부어 시선을 바로 두지 못했다. 박대통령은 차중에서 눈물을 멈추려 애쓰고 있었다. 나란히 앉은 뤼브케 대통령이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칠순 노인인 뤼브케 대통령이 사십대 후반의 젊은 대통령의 눈물을 직접 닦아주었다. 그리고 우정 어린 격려를 했다.

 

"울지 마십시오. 잘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 우리가 돕겠습니다.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해서 경제부흥을 이룩합시다.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경제 건설뿐입니다."

 

이것은1964 12 10일 서독 루르탄광지대에서 있었던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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