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27일

경부선 완공

산풀내음 2016. 11. 13. 09:52

1904 12 27, ..경부선 완공

 

1901 8 20일에 서울 영등포에서, 같은 해 9 21일에 부산 초량에서 일본 자본의 회사인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의해 기공되어 4년 후인 1904 12 27일 완공되었다. 1905 1 1일을 기하여 전선(全線)의 영업이 개시되었다. 그 해 5 25일에 서울 남대문 정거장(지금의 서울역) 광장에서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1901 8 20일 경부선 기공식

1905 5 25일 개통식

 

이는 우리나라에서 경인선(1899 9 18일 개통)에 이은 두 번째의 철도 개통이었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 체제 구축이 철도 부설 및 채광권 획득에서 비롯되었던 많은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부선의 부설은 일제의 우리나라 침략 정책 수행의 구체적 발판이었다.

 

1898년 ‘경부철도합동조약(京釜鐵道合同條約)’으로 경부철도의 부설권이 일본인 회사에 강압적으로 얻기 이전부터 그 기초 공작을 진행하였다. 마쓰다(松田行藏) 등은 1885(고종 22)에 내한하여 4년에 걸쳐 전 국토를 돌아다니며 지세·교통·민정 및 경제 상황을 은밀히 조사하였다. 이어 내한한 철도기사 고노(河野天端) 등도 당시 부산 주재 일본 총영사 무로다(室田義文)의 비호 아래 사냥꾼으로 가장하고 서울∼부산 간 철도 부설 예상 지역을 면밀히 답사한 뒤 측량 도면과 함께 보고서를 작성하여 1892년에 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

 

공사의 진행은 우리나라 관민의 저항과 반대, 용지매수 분쟁, 결빙과 홍수 및 화폐의 차이 등으로 많은 난관에 부딪쳐, 1902년 말까지 북부에서는 51.5, 남부에서는 53.1㎞만 완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임박하자 일제는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 공사를 서둘러 강행하였다. 결국 일본은 조선인을 부설공사에 인부로 강제동원하고 침목 등의 목재를 남벌해서 사용하는 등 약탈적인 방법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싼 값으로 건설됐다.

 

조선민족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여 부설된 경부선은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를 연결하는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으로 일본과 연결되었으며, 1905 4 28일 개통된 경의선과도 1906(광무10) 연결되어 신의주까지 직통했다. 경부선은 경의선과 함께 대륙 진출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어서 결국 경부선의 개통은 그 길을 닦은 셈이 되었다.

 

당시 경부선의 출발역인 초량역은 현재 정발 장군 동상 근처에 있었다. 그러다 철로를 연장해 임시 부산역에서 업무를 시작한 것이 1908 4 1일이다. 일제는 부산역사(사진) 1910년 신축한다. 총공사비로 974000원이 들었다. 역사부지는 88340, 본관 건평은 1183㎡였다. 1층은 역무실, 2층은 호텔로 사용했다. 지붕에는 돔을 얹고 시계탑을 세웠으며, 창문을 내단 각탑을 설치했다. 부산역은 부산세관, 부산우체국과 함께 부산의 3대 르네상스 건물로 꼽힐 만큼 웅장했다. 규모도 서울역사(1925) 보다 컸으며, 1914년 동경역이 완공되기 전까지 일본을 포함해도 최대 역사였다.

 

부산역

 

1911년부터 한()-(滿)간에 직통급행을 운행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국제선이 되었으며, 1913년 시베리아라를 거쳐 유럽 각국과의 화물운송을 담당했고, 1933년에는 부산-심양사이에 국제급행 ‘히카리’를 운행, 이듬해는 장춘까지 연장했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된 뒤에는 수송량이 급격히 늘어났고, 이에 따라 일제는 그 동안의 시설 보수에서 한 걸음 나아가 1936년에 경부선 복선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고, 1939년 부산~북경 사이에 국제급행 ‘고아’ ‘다이리쿠’를 운행하고 같은 해 복선을 준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