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발표

산풀내음 2016. 11. 13. 09:55

1945 12 27,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발표

 

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 즉 미국의 제임스 번즈, 영국의 어니스트 베빈,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1945 12 16일부터 모스크바에 모여 전후처리문제를 매듭지은모스크바 3(三相)회의(Moscow Meeting of Council of Foreign Ministers, 1945)’ 결과가 12 27 AP통신을 타고 국내에 알려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합동통신 워싱턴발 25일자 보도를 근거로 1945 1227일 아침조선일보에 먼저 실렸다. 석간이던동아일보는 몇 시간 뒤 같은 기사를 토씨 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실었는데, 다만 동아일보의 경우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고 제목을 붙여 독자가미국은 우리의 독립을 위해 애쓰는데, 소련은 우리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다는 인식을 뚜렷이 갖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당시 최대 우파 정당인 한민당과 함께 동아일보(한민당의 핵심인 김성수가 창간했고, 송진우가 사장으로 있던 신문이었다)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맹렬하게 전개했다.

 

사실 신탁통치는 미국의 오래된 공식적인 전후처리 방침이었다. 한국에 대해서도 미국은 신탁통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이미 1945 10 20일 미 국무부 극동국장이던 빈센트(John C. Vincent)에 의해 이러한 방침이 확인되어 국내에 보도되기도 했었다.

 

 

문제는 이 기사가오보(誤報)’라는 데 있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는 1216일부터 27일까지 미국영국소련 3개국의 외무장관들이 모스크바에서 모여 전후 처리 과정에서 미진한 문제를 합의하려 진행한 모임이었는데, 이 기사가 나오던 시점에서는 회의 내용이 채 공개되지 않았다. 그래서 기사 내용도 사실이 아니라 추정일 뿐이었다.

3상회의의 실제 합의 사항이 보도된 것은 1230일이었고, 신탁통치안을 제시한 쪽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보도와는 반대로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으며, 사실 미국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주장해왔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 11월 말 카이로회담에서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제스와적절한 과정을 거친 다음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데 합의했다. 국내에는 '독립시킨다'는 문구만 강조돼 전해졌지만, 사실적절한 과정이란 곧 신탁통치를 의미했다. 이런 구상은 1945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과도 합의됐는데, 당시 루스벨트는한국인은 자치 능력이 없다. 아마 40년 내지 50년 정도는 신탁통치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으나, 소련의 스탈린이그렇게 길게는 안 된다. 5년 정도로 하자고 했다.

 

Yalta Conference in February 1945 with (from left to right) Winston Churchill, Franklin D. Roosevelt and Joseph Stalin.

 

신탁통치의 내용은 조선에 임시로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고, 이를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며 최고 5년 기한으로 미 4개국이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선, 동아일보의 오보가 나온 12 27일 이후 신탁통치 반대 시위는 들불처럼 번졌다.

 

오랜 기간 동안의 식민지배에 막 벗어난 상황에서 또 다시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보도내용은 광범위한 대중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신탁통치안이 보도된 1945 12 28일 김구와 임시정부가 중심이 되어 각계 대표자들의 회합이 열리고 이튿날에는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로써 본격적인 반탁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김구와 임시정부는 매우 강경한 태도로 반탁운동을 주도했는데, 조심스럽게 신탁통치에 찬성 입장을 표명했던 한국민주당의 송진우가 1945 12 30일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구와 임시정부는 1945 12 31일 신익희 내무부장 명의로 국자(國字) 1호와 2호 포고문을 발표하여 미군정의 모든 한인 관리와 경찰들은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를 것을 선포했다. 이는 곧 당시의 통치권력이던 미군정을 부정하고 임시정부가 실질적 통치를 행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이해되었다. 이에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를 쿠데타로 규정하고 김구와 임시정부에 강력한 경고를 하기도 했다.

 

직접적인 권력 접수가 무위에 그친 후 김구와 임시정부는 이승만 세력과 연합하여 비상국민회의를 만들고 이것이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 약칭 민주의원)의 모체가 되었다. 반탁운동을 주도한 것은 김구와 임시정부였지만 그 성과로 나타난 민주의원 의장에는 이승만이 취임하였다.

 

하지만 반탁을 주장하던 좌익이 소련의 지령을 받아 1946 1 2일 돌연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광복 후 친일세력과 민족세력 간의 대립구도가 갑자기 좌우의 대립구도로 바뀌는 예측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좌우의 극단적 편가르기는 중도파들의 설 자리를 빼앗았고, 국내 정세는 극심한 남남갈등의 대결구도로 급속히 재편됐다.

 

반탁운동은 1945년 말과 1946 1월 초에 걸쳐 진행된 이후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재개가 가시화되면서 다시 한 번 전개되었다. 그러나 2차 반탁운동은 그 강도와 규모에 있어서 1차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면서 신탁통치 문제 자체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우익은 신탁반대, 좌익은 신탁찬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