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28일

나석주, 동양척식회사에 투탄 후 자결

산풀내음 2016. 11. 14. 21:18

192612 28,

나석주, 동양척식회사에 투탄 후 자결

 

중국 천진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던 항일독립단체인 의열단 소속 나석주가 1926 12 28일 일제의 경제침탈을 응징할 목적으로 경제침탈의 총본산인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다.

노동자 마중덕으로 변장을 한 나석주는 중국을 떠나 인천에 잠입하여 먼저 조선식산은행(롯데백화점 자리)을 폭파하였으나 불발로 실패했다. 곧이어 동양척식주식회사(외환은행 본점 자리)로 가 권총으로 여러명의 일본인을 사살하였으나 투척한 폭탄이 불발, 소기의 목적을 거두지 못하였다. 다시 조선철도회사에 가서 일본인들을 저격했다.

 

나석주 의사()와 동양척식주식회사()

 

그는 일본경찰의 추격을 받으면서 자신을 추격하는 경찰과 접전을 벌여 일본인 경부 다바타 등을 사살한 뒤 자신도 권총으로 자살했다. 서른다섯의 나이였다. 나석주는 죽기 전에 일본경찰이 이름을 묻자 자신의 성명과 의열단원임을 밝히고 순국했다.

 

나석주 의사의 의거를 보도한 동아일보 : 동아일보는 1 13일 호외를 발간했다가 경찰이 발표하지 않은 내용이 들어있다고 삭제 당하자 다시 '호외의 호외'를 발행했다.

 

나석주(1892-1926)는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재령 명신학교에서 2년간 공부한 뒤 농사를 짓다가, 1913년 간도로 이주했다. 간도 뤄쯔거우[羅子溝]의 무관학교에서 4년간 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황해도 겸이포에서 상업을 하며 항일공작원으로 일했다. 1919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었다. 석방된 뒤 정미업을 하며 비밀항일결사를 조직,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하여 보내고 대한독립단원들과 황해도 일대에서 친일파 숙청공작에 크게 활약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0 9월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 뒤 임시정부 경무국 경비원으로 일했으며, 1923년 허난성의 중국 육군군관단강습소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복무했다.

 

1925년 상하이로 돌아와 1926년 유자명의 소개로 톈진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입단했다. 1926 6월 톈진에 체류 중이던 유림대표 김창숙과 모의하여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 국내에 들어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다. 일본경찰의 추격을 받자 총격전을 벌인 끝에 다바타 등을 사살, 탄환이 떨어지자 자결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