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20일

반제회의 (Wannsee Conference)

산풀내음 2016. 11. 27. 09:29

19421 20,

반제회의 (Wannsee Conference)

 

1941 11 29일 국가보위부 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Tristan Eugen Heydrich, 1904-1942)는 ‘유럽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을 위한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베를린 교외의 한적한 반제(Wannsee)에 나치의 차관급 인사 13명을 초대하여 12 9일 회의를 개최하려 하였다. 하지만 12 8(미국 날짜로는 12 7)에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는 상황이 발발하자 이 회의는 취소되었다.

 

국가보위부 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하지만 취소된 회의는 1942 1 20일 아침, 반제에서 최초에 초대했던 13명과 함께 마침내 조찬회동을 가졌다. 이른바 '반제회의'가 열린 것이다회의는 친위대 소속의 아돌프 아이히만까지 포함해 모두 15명이었고, 하이드리히와 아이히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제3제국의 관료행정을 담당하는 직위에 있었다. 이들의 당시 직급은 차관급이었고 고위관료의 군에서는 세 번째 서열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내무성, 법무성, 수상 비서실, 나치당 대표 비서실, 동부 점령지구 담당성, 크라코프 총독 대리, 전시 경제 4개년 계획 담당청, 게슈타포(Gestapo)와 보안경찰인 지포(Sipo)와 보안대에서 실질적인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 살해와 약탈 및 운송의 실질적인 부서였던 재무성과 교통성 그리고 군부의 인사들은 초대되지 않았다.

 

반제회의 참석자들

 

동 회의에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 독일 점령지의 유대인들을 폴란드로 실어와서 모조리 죽이는 것이 결정됐다. 2시간 동안의 회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고, 이의제기와 토론도 없는 회의였다. 즉 이미 오래 전부터 하이드리히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그리고 회의에서는 독일인종의 순수성을 위해 독일과 유대인의 통혼으로 태어난 혼혈아의 강제불임이 제안되었다. 이 제안을 통해 참석자들은 독일에서 유대인들의 완전배제를 위한 1935년의 뉘른베르크 법령의 확대도 논의하였다.

 

이미 1941 10월부터 독일의 모든 철도에서는 유대인의 동부로의 강제이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반제회의 이전에도 강제수용소에서는 독가스가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반제회의 이후로 홀로코스트가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반제회의 이후로 '유대인 절멸'이 나치의 공식적인 뜻으로 확인되었고 대량학살이 죄의식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회의로 여겨지고 있다. 지금도 반제회의는 독일 교과서에 명기돼 독일인들의 참회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로 '프라하의 도살자'라고 불려졌던 그리고 1942년 1월 반제회의를 주관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같은 해 6월 4일 영국에서 훈련을 받은 체코슬로바키아 레지스탕스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반제회의 이전 나치에 의해 자행되었던 유태인 학살 관련 주요 사건


1941 6 22, 독일의 소련 침공과 함께한 학살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der Sicherheitspolizei und des SD)이라고 불리는 독일 특수 부대는 독일의 소련 침공이 진행되는 동안 소련 영토에 깊숙이 진격하여 유태인을 대량 학살하였다. 폴란드 침공 이전에는 주로 지식인, 성직자, 정치인 등 지도자층을 학살하였지만, 독소전쟁 당시에는 유태인 남성을 주로 사살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유태인 남자뿐만 아니라 여성 심지어 아이들까지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1943년 봄까지 이 부대는 1백만 명 이상의 유태인과 수십만 명의 유격대, 로마니(집시), 그리고 소련 정치위원 등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1 9 3, 아우슈비츠에서 실험적 가스 학살이 시작되다

 

폴란드 남부의 아우슈비츠에 있는 주요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실험적인 가스 학살이 진행된다. 600명의 소련 전쟁 포로와 250명의 병약자가 실험용 가스실로 들어가게 된다. 독일군은 지클론 B 가스의 살상 능력을 테스트하려고 한다. 지클론 B는 결정성 시안화 수소 가스의 상품명이었는데, 주로 살충제로 사용되었다. 이 실험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지클론 B를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학살 수용소의 살상제로 사용하게 된다. 대량 학살은 1942 1월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렇게 아름다운 장소가 유태인 절멸을 공식적 확인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