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21일

소련 최초의 국가원수 레닌 사망

산풀내음 2016. 11. 27. 20:11

19241 21,

소련 최초의 국가원수 레닌 사망

 

러시아 공산당을 창설하고 10월 혁명을 주도한 소련 최초의 국가원수 레닌이 1924 1 21일 고리키에서 네 번째 발작을 일으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54세였다. 오랜 기간의 혁명활동과 그에 따른 과로가 1921년 중반부터 극심한 두통으로 발전됐고 1922 5월에 첫 발작을 일으켰다. 1923 3월에 발병한 세 번째 정신착란으로 거의 식물인간 상태가 된 레닌은 사망한 뒤 스탈린에 의해 방부 처리돼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지하에 안치됐다.

 

 

다만 레닌의 죽음과 관련하여서는 여러 가지 미스터리가 남아있다. 레닌은 러시아의 봉건적 황제 체제를 몰아내 러시아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고 권력을 잡은 지 6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뇌졸증이지만 이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여러 가지 있다. 가장 큰 점은 레닌은 이전에 뇌졸증을 일으킬만한 신체적 결함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레닌은 과체중이나 고혈압 증세도 없었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 등 자신의 건강관리에 매우 철저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2012년 신경학자 해리 빈터스는 "레닌은 누군가에게 독살됐다" "그는 바로 스탈린이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앞서 1903년 볼셰비키 당에 입당했지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스탈린은 레닌을 만난 이후 정치적인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그 후 스탈린은 레닌의 오른팔로 살아가며 정치적 동지가 됐다. 레닌은 집권 4년째 요양 중이었고, 항상 2인자 자리에 머물렀던 스탈린은 야욕을 키웠다. 스탈린은 공산당을 자신의 사람들로 채우는데 이어 레닌의 분노를 사게 됐다. 스탈린과 레닌 사이의 감정은 극으로 치달았고 또한 여기에는 당시 트로츠키와의 권력 다툼도 한 몫을 하게 된다. 결국 스탈린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레닌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스탈린은 레닌의 주치의를 이용해 독약이 든 물을 먹게 했다.

 

레닌과 스탈린

 

또 한편 레닌이 매독에 의해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유럽신경학저널(The European of Neurology)의 기사에 따르면 "3명의 이스라엘 의사들이 참고문헌들을 뒤져 레닌이 1917 10월 혁명 전 유럽에 살면서 매독에 감염됐다는 논거를 도출해 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 같은 주장이 과거 소문으로 떠돌던 내용으로 새로운 사실은 아니지만 당시 유럽과 소련에서 레닌을 치료했던 의사들의 소견들을 모아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매독에 감염되면 처음에는 뇌를 포함해 전신에 궤양이 생기며, 열과 발진, 무기력증에 시달린다. 심할 경우에는 두통, 신경장애, 위통, 근육통을 앓기도 한다. 그러나 몇 년간 병세와 건강한 상태가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며 꽤 오랫동안 별 증상 없이 지내기도 한다.

그러나 감염 후 20년 이상 지나 말기에 이르면, 환자는 우울증, 무기력증, 치매와 함께 기분이 수시로 바뀌고 폭발적인 창조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레닌은 수개월간 매독 증세와 유사한 욕지기, 불면증, 부분적 마비, 심한 두통, 주기적 발작에 시달렸고, 스탈린이 공산당 지배의 음모를 획책할 때 명석함과 무능함의 양 극단을 오갔다. 때때로 그는 도움 없이는 걸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에 대해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며 회의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소비에트 시대 공중보건과 성 문제를 전공한 드류 대학의 프란세스 번스타인 부교수는 "소비에트 보건부는 혁명 후 매독 치료 캠페인을 전개했다"면서 "레닌이 매독 때문에 숨졌다면 그것은 아이러니의 극치"라며 논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가 본명인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 1870 4 22일 러시아 볼가강 연안에 있는 심비르스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사이자 장학사였고 어머니는 유태계였다. 맏형 알렉산드르 울리아노프가 알렉산드르 3세 암살 계획에 연루되어 1887년 처형당하자 당시 17세였던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고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기 시작한다. 1887년 가을 레닌은 카잔대학에 입학했으나 이해 12월 불법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난다. 이후 레닌은 카잔에서 혁명가들과 사귀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

 

레닌은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고 1891 12월 변호사 자격증을 받았다. 사마라에서 1893년까지 변호사로 일했다. 1895년 서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파리, 제네바, 취리히, 베를린 등을 방문하면서 플레하노프, 악셀로트 등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토론하고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를 찾아가기도 했다.

 

1895 9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서 마르크스주의의 우파인 멘셰비키파의 리더인 마르토프 등과 함께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을 조직했으나 1895 12월 당국에 체포돼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1897년 시베리아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한다. 그는 1898년 유배지에서 크루프스카야와 결혼했으며, 그곳에서 주요 저작이 된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집필했다. 책은 1898 8월 블라디미르 일린이란 가명으로 출판됐다.

 


Russian Bolshevik leader Vladimir Lenin and his wife Nadezhda, Gorki, Russia, August or September 1922. Lenin (1870-1924) and Nadezhda Krupskaya (1869-1939) married in 1898 when they were both living in exile in Siberia.

 

1900 1월 유배 형을 마쳤고 5월 다시 서유럽으로 떠났다. 그는 독일 뮌헨에서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등과 더불어 마르크스주의 최초의 정치신문인 이스크라 1900 12월 말 창간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과격 정통파)와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한 멘셰비키파(당내 우파)로 양분되었다. 서유럽으로 망명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격렬한 논쟁과 분쟁을 겪는 동안 그들의 조국 러시아에서는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면서 혁명의 열기가 불붙기 시작한다. 이에 레닌은 1차 망명을 끝내고 귀국하기로 한 것이다. 1차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는 조국에서 레닌은 본격적인 혁명조직을 만들어감과 동시에 멘셰비키파와 격렬한 분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1907년 러시아에서 입헌 쿠데타가 일어나 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됐다. 볼셰비키파는 지하로 숨어야 했고 레닌은 다시 해외 망명길에 올랐다. 두 번째인 이번 망명은 1917년까지 이어진다. 망명기간 내내 멘셰비키의 공격과 볼셰비키 내부 진영의 도전에 시달리던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론’(1908)을 발표하고, 1912년에는 프라하에서 볼셰비키만의 당대회를 소집하며 멘셰비키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다.

 

1917 2월 페트로그라드(191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명)에서 드디어 니콜라이 2세가 물러났다. 스위스 취리히에 머물던 레닌은 32명의 러시아 망명자들과 함께 1917 4 3일 늦은 밤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페트로그라드에는 각 공장에서 선출된 노동자 대표위원회인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구성되어 있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농민당 당원들이 중심이 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2월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부르주아 지도자들이 새 정부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여전히 소수파였다. 이에 레닌은 2차 망명을 마치면서 준비한 10개항의 ‘4 테제’를 발표한다. 4월 테제’는 ‘임시정부 타도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1917 7 3일 있었던 볼셰비키의 무력시위가 임시정부에 의해 진압된 후 레닌은 다시 핀란드로 도피했다. 그러나 온건사회주의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끌던 임시정부는 전쟁에 대한 대중의 염증과 경제파탄으로 급격하게 지지기반을 잃어갔다. 9월 들어서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전국적인 지지를 얻게 되고 다수파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해 10, 레닌은 비밀리에 페트로그라드에 잠입하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중앙위원들을 설득했고 의장인 트로츠키의 협력을 얻어 ‘적위대’을 조직하는 데 성공한다.

 

결국 1917 11 7(러시아력 10 25) 10시 볼셰비키 적위대는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하고 모든 국가권력이 소비에트로 넘어왔음을 선포한다. 11 8(러시아력 10 26) 새로운 소비에트 정부인 소브나르콤(인민위원평의회)이 평의회의 갈채 속에 탄생했다. 레닌은 의장이 되었다. 10월 혁명이 완결되는 날이며,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완성된 날이었다.

 


러시아 10월 혁명 연설장면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 대표들

 

레닌은 1918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개칭했고, 1919 3월에는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진하기 위해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3인터내셔널)을 창설했다.

 

Vladimir Lenin presents a report on the international situation at a session of the Second Congress of the Comintern. Petrograd, 19 July 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