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31명 서울 침입 (김신조 사건)

산풀내음 2016. 11. 27. 20:25

19681 21,

북한 무장공비 31명 서울 침입 (김신조 사건)

 

1968 1 13일 북한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작전지시를 받은 124부대원 31명은 17일 오후 11시 결빙된 임진강을 건너 고랑포 일대로 침투하여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돌파했다. 미군 2사단이 철책선을 담당하던 서부전선 군사지역에 잠입하여 하룻밤을 보낸 이들은 19일 밤 8 30분경 결빙된 임진강을 건너 경기도 고양군 법원읍 삼봉산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또 하룻밤을 보낸 31명 부대원은 20일 앵무봉을 통과하여 비봉, 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내려왔으며, 21일 밤 10시 세검정 파출소 관할 자하문 초소에 이르게 된다.

 

 

이들은 전원 기관단총을 소지하고 1인당 실탄 300, 권총 1, 대전차용 수류탄 2발과 대인 수류탄 10발로 무장하고 국군복장을 한 채 침투하였다. 이들은 21일 오후 8시 청와대를 기습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고 차량을 탈취하여 북으로 도주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공비들은 법원리에서 처음으로 민간인과 마주쳤다. 당시 나무를 하러 온 우씨 4형제를 체포하고 이들에 대한 처리를 북에 문의하였지만 암호문 해독이 되지 않아 결국 이들을 풀어주게 되었다. 풀려난 우씨 형제들은 산에서 내려오자 경찰에 신고하였고 즉시 군경합동 차단선이 구축되었지만 이미 공비들은 차단선을 벗어난 뒤였다. 당초 우리 군경이 예상했던 공비들의 이동속도보다 2배나 더 빠르게 이동했던 것이었다.

 

한편 그리고 이렇게 쉽게 청와대까지 불과 500m를 남겨둔 지점까지 저지 없이 올 수 있었던 것은 첫째, 당시 미 2사단이 담당한 서부전선의 철책선 경계태세는 이들의 침투를 막기에 역부족일 정도로 허점이 산재해 있었다. , 부대 중앙보다는 상대적으로 빈틈이 많은 서로 다른 두 부대의 사이 즉, 미군 2사단과 한국군 25사단이 경계를 이루는 경로를 이용해 침투했기 때문이다또 하나 이들이 낮에는 잠복하고 밤에만 이동했다는 점과, 미군을 속이기 위해 한국군 복장을 했다는 점 등도 한몫 했다.

 

자하문 초소에 다다른 부대원 31명은 이곳에서 검문을 받게 된다. 검문에 나선 경찰관이 신분증을 요구하자 이들은 "방첩 대원들이다"라고 답한다. 계속적인 신분증 요구에 이들은 "우리 부대로 가자"라며 위협적인 태도를 보여 무사히 빠져 나가는 듯 했다. 그러나 약 400m를 더 올라간 시점에 아래쪽에서 지프를 타고 올라온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의 제지를 받게 된다.


이들을 수상하게 여긴 최 서장은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이들을 막아선 후 "소속을 밝히시오. 외투 안에는 뭐가 들었소?"라고 물었고, 때마침 버스 두 대가 뒤 따라 올라 왔다. 순간, 후미의 버스를 지원 병력이 탄 차량으로 오판한 침투 부대원들은,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의 가슴에 총을 쏜 뒤 버스에 수류탄을 던지고 흩어져 달아났다.

 

자하문 초소 일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고막이 터질 듯한 자동소총 발사음과 수류탄 폭발음이 진동했다.

초소 근무자들은 곧바로 상황을 군에 알렸고,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한 군과 경찰은 합동수색대를 편성했다. 그러나 사전에 모의한 데로 31명의 특수부대원들은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졌다. 중무장한 부대원들은 군·경 합동수색대를 피해 각자 북한으로 도주를 시도한 것이다.

 

이 과정에 서대문구 홍제동에서 한 시민이 부대원과 격투를 벌이다 무참히 살해되는 등 그날 밤에만 민간인 5명이 북한 특수부대원들에게 살해당했다. , 최규식 서장은 이들이 쏜 총에 의해 순직했으며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었고,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들이 수류탄 투척으로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31명 특수부대원의 뒤를 쫓은 군·경 합동수색대는 마침내 22일 새벽 3시경 인왕산 기슭에서 김신조를 생포한다. 이어 이날 밤 5명을 사살하고 경기도 일대에 걸친 대대적인 수색작전 끝에 31일까지 총 28명의 부대원을 사살한다. 그러나 나머지 2명은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군 병력 1 9,213명이 동원된 작전은 종료되었다.

 





침투한 무장공비들의 임무는 청와대 폭파와 요인 암살, 주미 대사관 폭파와 대사관원 암살, 육군본부 폭파와 주요 지위관 암살, 서울 교도소 폭파와 서빙고 간첩수용소 폭파와 북한 간첩 대동 월북 등으로 밝혀졌다. 이 무렵 북한의 대남공작은 중소분쟁에 따른 소련의 대북 군사원조 중단, 남한의 급격한 경제발전 그리고 국군의 월남파병 등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강화 등으로 인해 위축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정간첩 남파와 지하당 구축을 통한 대남공작에서 유격 거점 확보를 위한 직접 군사행동으로 전환되는 시점이었다. 


결국 북한 민족보위성은 적극적인 대남유격활동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결정하고 1967년 4월 정찰국 산하에 유격전 특수부대인 124군부대를 조성하였던 것이었다. 이 부대는 각 부대의 정예요원 2400명으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8개 기지에 300명씩 분산되어 고강도 특수훈련을 받았다. 그 중 제6기지가 서울, 경기지역에 대한 침투 파괴 공작을 담당하였는데 1968년 1월 2일 청와대 습격 등 대남 침투 지시가 내려졌고 부대원 중 31명을 선발해 1월 5일부터 가상 모의훈련에 돌입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1월 13일 정찰국장 김정태가 직접 방문하여 격려와 더불어 구체적인 침투지시를 하달한다.


그러나 이러한 징후는 사전에 우리에게 포착되었고 1968년 1월 6일 야전군 사령부 회의실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재하에 군관합동회의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월 16일에는 국방부가 5분 대기조 설치를 발표하는 등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즉각적이고 유기적인 작전전개를 통해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한편 이 사건 후 우리군은 국가 비상사태 시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태극연습을 그 해 처음 실시하였고, 이듬해인 1969년 을지연습으로 개칭해 지금까지 매년 실시하고 있다. ,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해 향토예비군을 창설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이 사건으로 경기도 양주시와 서울 우이동까지 북한산 자락을 잇는 우이령길(일명 소귀고개) 6.8Km가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이 됐다. 서울의 DMZ라 불리던 이 길은 41년만인 2010 227일 민간인에 개방됐으며 '김신조 루트'라 불렸다.

 

1970년 김신조는 최정화와 결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