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26일

국회, 월남파병안 가결

산풀내음 2016. 12. 2. 13:59

19651 26,

국회, 월남파병안 가결

 

베트남에 전투병력을 파견하는 2차 파병안이 1965 1 26일 국회에서 가결됐다. 파병 병력은 2,000여 명으로 공병, 수송 및 자체방위부대 등이었고, 파병안은 재석 125명 중 찬성 106, 반대 11, 기권 8표로 통과됐다. 이날 국군 월남파병안이 통과 됨으로써 국방장관에게 1 29일 임명장을 받은 조문환 주월한국군 단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첫 과업은 홍수피해복구작업이라 밝혔다.

 

좌로부터 케네디, 박정희, 그리고 존슨

 

5.16 군사 정변 직후인 1961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는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Jack" Kennedy,1917 5월 29 ~ 1963 11월 22)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쿠데타로 얻은 정권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미국이 원한다면 병력을 월남에 파병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군이 월남에 파병되면 중국과 소련을 자극할 것이라 우려했고 이를 거절했다. 대신 미국 정부는 경제원조를 약속하면서 사실상 군사정부를 승인하였다.

 

1961년 방미 당시 케네디와

 

1963년 케네디 암살로 린든 존슨이 대통령 직을 승계한 이후인 1964 9월 제1이동외과병원 병력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을 파견하면서 한국의 베트남 참전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월남전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면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 8월 27 ~ 1973 1월 22)1965 5월 박정희를 미국으로 초청해 성대한 퍼레이드까지 해주면서 한국군의 전투병력을 파병해줄 것을 요청했다. 린든 존슨은 1개 사단급의 병력을 우선 증파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대가로 군 장비 현대화와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제안을 한다.

즉 베트남 파병이 실제 이루어진 것은 결국 미국의 요구 때문이었으며, 외교, 경제, 국방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의존하던 당시 대한민국 현실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하였다.

 

1965 5 16일 방미,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존슨 대통령, 린든 존슨은 박 대통령에게 미국 대통령 전용기까지 보내 정중하게 미국으로 모셔 온다.

 

같은 악수인데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누가 부탁을 해야 하는가에 따라.

 

파병안에 따라 1965 225일 비전투원 2,000여 명으로 구성된 비둘기부대가 파병됐고, 10월에는 전투부대인 해병대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가, 1966 9월 백마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했다. 한국군 파병은 1973 3 23일에 한국군이 모두 철수할 때까지 8년여 동안 총 31 2,853명이 참전했다.

 

처음에는 강제로 차출하였지만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자원자들을 보냈다. 당시 병사 선발 방침에 가급적 국민학교 3년 수료 이상을 선발하라고 한 것을 보면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외국 구경은 꿈도 꾸지 못했던 젊은이들이 그저 부모님께 송아지라도 한 마리 사드리려고 자원했던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머나먼 이국 땅으로 가서 전쟁을 치른 한국 병사들이 받은 월급은 제 나라에서 징집된 베트남 병사들이 받는 월급에도 미치지 못했다. 주월 한국군 사령관이 받는 월급은 필리핀군이나 태국군 소위의 월급보다 한참 적었다. 한국군의 파병은 미국에게는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백색 제국주의가 아시아를 침략했다는 비판을 완화시켜주는 등 전체적인 효과를 차치하고라도, 경제적인 면에서도 미국은 전쟁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한국군 1명의 연간 유지비가 5,000달러인 반면, 미군 1인당 유지비는 13,000달러였으니 그 차액 8,000달러를 파월 한국군 연인원 32만으로 곱하면 미국은 무려 25억 달러 이상의 전비를 절감한 것이다.

 

참전기간 동안 한국군은 1,170회의 대규모 작전과 55 6,000회의 소규모 작전을 펼쳤으며 5,000여 명이 전사하고 수만 명이 부상당했다. 하지만 참전 대가로 벌어들인 10 3,600만 달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