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4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발족

산풀내음 2016. 12. 7. 22:45

19662 4,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발족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과학기술분야에서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우리나라에 산업기술개발과 기술지원이라는 사명을 갖고 1965년 박정희 대통령과 미국 존슨 대통령의 합의에 의해 미국 바텔연구소를 모델로 1966 2 4일 발족됐다. 초대 소장으로 최형섭 박사가 임명되었다. 처음에는 미국의 바텔 메모리얼 인스티튜트(Battelle Memorial Institute)라는 연구소의 자매기관으로 출발하였으며, 1969 10월에 종암동에 연구소 건물이 준공되었다.

 

KIST 설립에는 당시 과학기술에 대한 시대적 열망을 반영한 것이다. 1960년대 대한민국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제조업을 비롯한 모든 산업활동이 활기를 띠고 있었고 내수와 함께 수출도 늘어 수출상품의 다변화와 품질 개선 등 제품 경쟁력 강화가 Hot Issue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편 공업인프라는 불모지인 상황에서 1960년대 공업 관련 연구소 설립이 처음으로 제안되었다. 정부는 공업발전과 관련한 사업 추진 과정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과학기술 진흥계획도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수립했다. 따라서 1964년 정부차원에서 종합적인 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을 모색하였지만 재정확보가 어려워 실패했다.

 

그러던 중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베트남 파병에 대한 보답으로 미국에 초청되었는데 5월 미국 공식방문 당시 정상회담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 존슨 대통령에게 한국 공업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종합연구소 설립에 대한 희망을 내비쳤고 미국 존슨 대통령이 이에 지원 약속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65년 방미 당시 박정희와 존슨() 1965년 호닉 미대통령 경제담당고문 인천전기 시찰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기공식(, 1966)과 준공식(. 1969)


초창기의 모습

 

시설 공사와 더불어 연구를 수행할 인력 유치활동도 병행됐다. KIST는 우수한 연구인력 확보를 위해 해외 한인과학자 유치에 힘썼으며, 18명이 1차로 연구소와 계약을 맺었다. 이들은 높은 급여와 주택, 자녀의 취학 편의 제공 등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특히, 200~400달러에 달한 월급의 경우 국립대학 교수의 3배에 가까웠고 대통령보다 월급이 많은 사람도 있었다. 박대통령도 불시에 KIST 연구원들을 방문해 사기를 북돋아줬다

 

1970년대에는 선진국 기술을 활용하여 폴리에스터 필름, 동복강선(銅覆鋼線) 등을 산업계에 보급하였다. 또한, 정부와 기업에서 요구하는 연구과제와 기술개발을 수행함으로써 국가산업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기여했다. 1980년대에는 반도체 소재, 광자기디스크 등 첨단기술을 개발하여 우리나라 산업의 국제 경쟁력 강화에 기여했고, 1990년대 이후에는 미래 산업을 대비한 기초기반 기술과 원천기술 개발에 힘썼다.

KIST의 성공적 운영 사례는 다수의 정부출연 연구소 발족으로 이어졌고, 한국선박연구소, 해양개발연구소,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등 특수 전문 연구기관들이 KIST에서 분화·발전하며 우리나라 연구 개발 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1981 1월 이공계 특수대학원인 한국과학원(KAIS)과 통합되어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되었으나 1989년 다시 분리되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으로 재발족했다. 1996년 독일, EU, 동구와의 기술교류 및 공동연구 거점 확보를 위해 KIST유럽연구소를 설치했으며, 2003년 강릉분원과 2008년 전북분원을 설치했다. 2008년 교육과학기술부 기초기술연구회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