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2월 4일,
록히드 사건 (Lockheed bribery scandals)
1976년 2월 4일, 미상원외교위원회 다국적기업소위원회에서 미 항공기 제작사인 록히드의 회계담당자가 신형 ‘트라이스타-L1011형’의 판촉을 위해 일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 총 1,600만달러의 뇌물을 제공했다고 증언했다.
Delta Air Lines Lockheed L-1011 TriStar 250
이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의 여당은 전후 최대의 혼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4월 록히드사건에 대한 미국측의 미공개 자료가 일본측에 전달된 이후 6월부터 마루베니, 젠니구 등의 간부가 계속 체포되고, 7월 27일에는 전(前) 수상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가 체포되었다.
다나카 전 수상이 7월 27일 체포되고 있다.
Japanese protesters
march on governmental buildings in protest of the Lockheed Martin bribery
scandal.
검찰은 다나카 전 총리가 총리 재직 중이던 1972년 자택에서 일본 항공사인 젠니쿠(全日空)가 록히드 비행기를 선정, 구입토록 운수상에게 지시했고 그 성공 보수로 현금 5억엔을 약속받았다는 점을 들어 그를 기소했다. 이어 다나카 전 총리가 비서를 시켜 4차례에 걸쳐 5억엔을 록히드측으로부터 건네받았다는 점도 기소장에 적시했다. 성역없는 수사를 통해 결국 정계에서 다나카 전 총리를 비롯해 현역 정치인 3명과 젠니쿠 회장 등 대기업 간부 등 16명을 형사소추했다.
이것은 정치인, 고급관료, 대기업이 제각기 이익을 챙기려는 정경유착관계에서 발생한 구조적 오직(汚職)사건으로, ‘청렴한 미키’를 자신의 이미지로 내세우고 있던 수상 미키 다케오[三木武夫]도 여론을 배경으로 사건규명에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자민당 간부들 사이에서는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 정치, 경제구조 그 자체의 부패가 폭로되어 보수정치체제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확산되었고, 미키를 수상직에서 끌어내리려는 정치공작도 시도되었다.
이에 대하여 미키는 여론의 지지를 기반으로 반대파 각료를 파면하고 국회해산이라는 강경한 입장으로 대응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 사건으로 자민당 내 고노, 요헤이 등 6명의 의원이 금권정치를 비판하고 탈당하여 ‘신자유클럽’을 결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자민당과 내각을 지배한 전 수상 다나카의 신화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다나카 전 총리는 1, 2심에서 징역 4년, 추징금 5억엔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수사 착수 6개월 만에 전직 총리 구속이라는 전대미문의 실적을 올린 이 사건의 재판은 무려 19년을 끌었다. 1995년 2월에서야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내려져 다나카 전 총리 등 11명에게 유죄가확정됐다. 다나카 전 총리는 그러나 상고 중인 1993년 사망했다.
'역사속에 오늘, 2월 > 2월 4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롤스로이스 (Rolls-Royce Ltd) 파산 (0) | 2016.12.07 |
---|---|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발족 (0) | 2016.12.07 |
경향신문 `여적(餘滴)` 필화사건 (1) | 2016.12.07 |
얄타회담 개최 (0) | 2016.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