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16일

KNA여객기 ‘창랑호’ 피납

산풀내음 2016. 12. 17. 17:15

19582 16,

KNA여객기 창랑호피납

 

1958 2 16일 오전 11 30분 부산수영비행장을 이륙한 대한국민항공사(KNA)소속 민항기인 DC-13 창랑호가 여의도 공항에 도착할 12 40분경 평택 항공에서 기수를 돌려 북으로 강제 납북되었다. 새로운 목적지는 북한의 평양 순안 국제공항으로 창량호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에 강제 착륙했다. 5명의 남파공작원과 2명의 월북동행자가 합작한 대한민국 최초의 항공기 공중 납치사건인 ‘창랑호 납북 사건’이다.

 

납치범들은 비행기가 경기도 평택 상공에 이르렀을 때 탑승객 중 군인 2명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쳐 실신시킨 다음 칼빈총과 엽총을 기내 앞뒤에서 발사하면서 조종사를 협박, 기수를 평양으로 돌리게 했다.

 

동아일보 창랑호 월북기사

 

창랑호는 대한민국 최초의 민항사 대한국민항공사의 여객기였다. 당시 비행기의 기장과 부기장은 모두 미국인이었으며, 승무원 3, 승객 28명과 납치범 7명 등 총 38명이 탐승하고 있었다기내엔 기장인 윌리스 P. 홉스 등 미국인과 독일인 부부 등 외국인이 포함돼 이후 주한 미군대사간과 독일대사관이 승객 송환을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또한 탑승자 가운데에는 미군 군사고문단원인 미군 중령, 국회의원 유봉순과 공군정훈감 김기완 공군대령도 포함돼 있었다.

 

북한은 다음 날인 2 17일 언론기관을 동원해 ‘의거입북(義擧入北)’을 했다고 공표했다. 당시 북한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의 방북을 앞두고 '남한 비행기가 자진 월북했다'는 체제 선전을 위해 납치극을 꾸몄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정부는 2 20일 북한 공작원 김택선 등 3명을 납치범으로 발표했고, 22일 국회에서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를 행하고 UN군에 협력을 요구했다. 유엔 군사정전위원회는 24일 북측에 승객, 승무원과 기체를 즉시 송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후 북한은 탑승자 38명 중 납북자를 제외하고 탑승자 26명만을 3 6일 판문점을 거쳐 송환했고 기체는 억류했다. 또한 납치범들은 승객으로 있던 사람 중 군사고문단원인 미군 중령 1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머지 5명은 북한으로 귀순했다고 주장했다.

 

경찰당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비행기납치사건으로 기록된 이 사건을 납북의 총책임자 기덕영 조종 하에 공작원 김택선, 김길선, 김순기, 최관호, 김형, 월북동행자 김애희와 김미숙 등 7명의 납치범을 발표하고, 기덕영 등 3명을 사건의 공작과 배후 혐의로 체포했다. 그러나 납치범들이 월북했기 떄문에 사건의 전말을 온전하게 밝힐 수 없었던 탓에 기덕영을 제외한 2명은 무죄로 석방됐다.

 

이후 납북된 창랑호의 기체가 반환되지 않아 대한국민항공사는 운행상의 커다란 타격을 입어 적자를 해소하지 못했다. 결국 대한국민항공사 창업주 신용욱(1901-1961) 대표는 1961 7월 한강에 투신자살을 하기에 이르렀고, 1948년 설립된 대한국민항공사는 1961 11 13일 폐업처리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남한에서는 반북 반공 궐기대회가 전국에서 끊임없이 개최됐고,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힌 납북 승객의 강연회를 듣기 위해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몰렸으며, 공무 집행 중 몸을 다친 군경들이 북한을 성토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58 KNA광고

'역사속에 오늘, 2월 > 2월 16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동주 일본서 옥사  (0) 2016.12.17
나일론 특허 취득  (0) 2016.12.17
경성방송국, 국내 첫 라디오 방송 송출  (0) 2016.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