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19일

미군, 일본 이오지마에 상륙

산풀내음 2016. 12. 18. 17:12

19452 19,

미군, 일본 이오지마에 상륙

 

태평양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45 219, 미 함대의 맹렬한 함포사격과 함께 미 해병대가 일본 도쿄 남쪽 약 1100km 지점에 위치한 오가사와라(小笠原) 열도의 화산섬 이오지마(硫黃島)에 상륙했다.

 

 

전쟁이전에는 유황의 채굴이나 사탕수수 재배 등으로 생활하는 10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였고, 1941년 개전 당시 일본군은 인근 섬 지치지마에 3,800여 명의 군대를 배치시켰고 그들에게 이오지마를 관리하게 했었다. 개전 후에 남방 전선과 일본 본토를 묶는 항공 수송의 중계지점으로서 이오지마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해군이 이오지마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1944년 미국은 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하고 이 곳을 기점으로 B-29를 이용한 일본 본토 폭격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마리아나와 일본 본토간의 거리가 상당해 B-29를 본토까지 일반 전투기가 호위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고 또한 중간 지점에 위치한 이오지마에서의 일본 전투기의 저지로 빈번히 B-29가 요격되고 만다.

 









 

따라서 미군 태평양 통합작전본부는 이오지마를 점령하고, 일본군의 항공기지를 파괴한 뒤 미군의 전진 항공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이오지마 공격을 결정했다. 4일간의 공방전이 지나고 태평양전쟁 중에서도 최악의 날로 기록된 223, 산의 모습을 바꿀 정도의 맹폭으로 마침내 산 정상 스리바치산(摺鉢山)이 함락됐다.

 


 

이어서 3 17일 미국은 섬 전체를 장악했고 3 26일 남은 일본군이 마지막 전투를 벌였지만 전멸함으로써 이오지마 전투(Battle of Iwo Jima)는 끝을 맺었다. 일본군은 거의 90%에 가까운 1 9,900여명이 옥쇄했고, 미군도 6,800여명이나 전사했다. 이오지마 함락으로 일본은 개전 후 처음, 식민지가 아닌 자신의 영토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해야 했지만 태평양전쟁은 비로소 종전으로 물꼬를 틀었다.

 

성조기를 스리바치산 정상에 힘있게 꽂는 6인 용사들의 모습이 AP를 타고 미 언론에 보도되자 감동과 환희의 물결이 미국 전역에 퍼져갔다. 7번째 전시 국채를 발행한 미 정부도 국채 판매를 위해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장면보다 영웅적인 화면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진은 기자에게 퓰리쳐상을 안겨주며 우표와 아이스크림 등에도 사용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진짜 영웅이 아니었다. 함락순간을 놓친 사진기자 로젠탈스가 뒤늦게 산에 올라 연출한 사진임이 밝혀졌다.

 

1945 2월 태평양 전쟁의 분수령이 된 ‘이오지마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들이 일본 이오지마섬 스리바치산 정상에 미국의 상징인 성조기를 꽂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조 로젠탈은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나중에 연출 논란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