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19일

중국 등소평(鄧小平) 사망

산풀내음 2016. 12. 18. 17:24

19972 19,

중국 등소평(鄧小平) 사망

 

 

중국의 막후 실력자 등소평(Dèng Xiǎopíng, 1904-1997) 1997 2 19일 향년 93세로 사망함으로써 모택동, 화국봉에 이은 세번째 최고지도자부도옹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1978 3차 중국 공산당 중앙위 전체회의(11 3중전회)에서부터 시작된등소평시대는 개방-개혁의 시대였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 등소평이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해 중국을 개혁할 때 내세운 이 주장은 일명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으로 불리며, 시대의 금언으로 자리 잡았다.

 

등소평(鄧小平) 1904년 중국 사천성(쓰촨성, 四川省)의 한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이 때문인지 등소평은 14세의 나이로 일찍이 프랑스 파리 유학을 떠나게 됐지만, 파리에서 막시즘에 빠지게 되어 모스크바의 중산(中山)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귀국, 광서(廣西)에서 공산당의 지하 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모택동(毛澤東)이 이끄는 대장정에 참가했으며, 팔로군 정치위원으로 장강 도하작전, 난징점령 등중화인민공화국수립의 역사에서 큰 공을 세운 그는 1952년 정무원 부총리를 시작으로 중국 공산당의 요직을 맡았다. 이후 류샤오치(劉少奇)와 함께 물질적 보상제도를 통한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실용주의적 노선을 취했던 등소평은, 1965년 문화대혁명의 시작과 함께 홍위병으로부터 실용주의적 노선에 대해 크게 비판 받고 실각하게 된다. 이후 1973 3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추천으로 다시 복권돼 국무원 부총리가 됐지만, 저우언라이의 죽음과 함께 다시 권력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모택동의 죽음 이후 다시 복권된 등소평은 이후 1981년 중국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등소평은 삼보주(三步走)를 목표로 세우며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1 “1981년부터 1990년까지 국민총생산액을 2배로 증가시켜 중국 인민의 의식(衣食)를 해결하겠다, 2 “1991년부터 20세기 말까지 국민생산액을 2배로 증가시켜, 인민의 생활 수준을 중류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 3대동사회를 실현해 국민총생산액을 중진국수준으로 이끌어내고, 부유한 생활을 향유할 수 있기 해 현대화를 실현한다.

 

 

이러한 자유경제주의의 업적 외에도 등소평의 대표적인 업적에는홍콩반환이다. 영국은 자본주의인 홍콩이 사회주의 국가인 홍콩에 반환되면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며, 영토는 돌려줄 테니, 관리는 자신들이 하겠다며 중재안을 냈다. 중국으로서는 고민이 되는 상황일 법도 했다. “홍콩을 돌려받지 않는다면, 국가의 위상은 떨어질 것이고, 자본이 빠진다면, 홍콩은 자멸한다.”는 여론이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등소평은일국양제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 홍콩의 체제는 그대로 두고, 자신들이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등소평은 중국에 시장경제를 도입한 지도자로 지금의 중국이 만들어지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천안문사태 등 비판을 받을 만한 요소는 물론 있지만, 중국의 위상이 지금에 이르는데, 등소평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