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28일

대만 ‘2ㆍ28사건(February 28 Incident)’ 발생

산풀내음 2016. 12. 24. 23:48

19472 28,

대만 ‘228사건(February 28 Incident)’ 발생

 

1945 8월 일제가 패망하고 그 해 10 17국민혁명군타이완에 상륙함으로써 중화민국타이완 을 영토로 회복하였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이 집권하던 중화민국 정부는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내전(國共內戰)으로 인해 타이완에 정예 관료나 군인을 보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행정단위인 성()을 설치하는 대신 천이(陳儀)타이완 의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으로 임명해 이 곳을 국민혁명군의 군사점령지역처럼 관리했다.

 

일전쟁 이후 50년간 일제의 지배와 수탈을 받던 타이완 주민들은 새 중화민국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그들의 통치는 본토에서와 다르지 않았고, 일제(日帝)의 식민통치만큼 가혹했다외성인(外省人)에 비해 본성인(本省人)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요직은 장제스(蔣介石)를 위시한 외성인들이 차지했고, 정부가 본성인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정책을 펴자 주민들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다. 본성인은 명나라때부터 대만에 건너와 살던 중국계 후손이고 외성인은 1940년대 대륙에서 패퇴한 국민당과 함께 건너온 중국계를 말한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1947 2월 27 밤, 타이베이(臺北)시 위엔환(圓環) 빌딩 안의 복도에서 정부의 전매(專賣) 독점품인 담배를 노점에서 팔던 린쟝마이(林江邁)라는 여인이 허가 받지 않고 담배노점을 벌였다는 이유(또는 밀수 담배를 팔았다는 이유)로 담배주류공사의 직원과 경찰에 의해 단속되었다. 탈세를 빌미로 담배주류공사의 단속반원이 담배를 팔던 여인을 상대로 총신으로 머리를 때리는 등 심한 구타를 가하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과격한 단속 행태에 항의하면서 충돌이 빚어졌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항의하는 군중에게 발포하였고, 경찰이 쏜 총에 학생 한 명(陳文溪)이 사망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1947 2월 28, 민간인 사망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들이 발포공무원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며 타이완에 들어와 있던 중화민국 경찰과 군부대 본부를 에워싼 채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타이완 경비총사령 천이(陳儀)는 시민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시위를 빌미로 타이베이시에 임시 계엄을 선포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급기야 경찰서에 난입, 경찰들을 구타해 경찰관이 사망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천이의 집무처로 밀려든 시위대를 향해 군()이 기관총소사를 퍼부어 많은 사상자를 냈다. 시위는 타이베이 시내 도처에서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의 양상으로 확대되었고, 분노한 시위대는 방송국을 점거하고 타이완 전 주민이 궐기할 것을 외쳤다. 이것이 이른바 '2·28사건'이다. 2월 28 당일에는 타이베이 전역에서 파업과 철시 및 데모대의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었고, 3월 1 이후 시위는 타이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타이완 내의 병력만으로는 시위의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천이는 주민들을 상대로는 타협적인 제스처를 보이며 시간을 벌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장제스에게 대륙에 있는 국민혁명군의 조속한 증파를 요청했다. 국민혁명군의 증원군이 도착한 1947 3월 8부터 타이완에서는 대대적인 유혈진압이 시작되었다. 진압은 10여 일간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졌고, 본성인(本省人) 3만 명이 살해,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혈진압에 나선 군인들


 

이러한 대규모 살육과 약탈은 3월 17 국방부장 바이충시(白崇禧)가 대만에 도착하여 조율에 나선 후 3월 21이 되어서야 진정되었다. 진압과정에서의 학살과 약탈로 인해 타이완은 섬 전체가 초토화되었고, 장제스 '2.28 사건 처리 위원회' 인사들의 체포를 명령하고 위원회의 구성원 상당수를 처형했다. 결국 2.28 사건은 5월 16 장제스가 공식적으로 사태 종료를 선언하면서 일단락되었다.